풀국사
-윤제림
얘야, 이 사진 좀 보아라.
엄마가 한국으로 돈 벌러 갔을 때란다.
… 모처럼 쉬는 날이라서
우리나라 사람들 열댓 명이
놀러갔었지.
아주 유명한 절이었어.
아름다운 축대와 돌계단,
사진엔 안 보이지만
오래된 돌탑이 둘 있고,
긴 회랑을 따라
철쭉꽃이 흐드러졌었지.
절 이름?
뭐더라. 엄마도 찾아봐야 알겠다.
네 아빠가 사준 것이라서
한 번도 안 쓰고 넣어둔
수건 한 장.
여기 있다,
풀, 국, 사 관광기념.
그래,
엄마가 지금 네 나이에 돈 벌러 갔던
먼 동쪽나라의
늦은 봄날 오후였다.
풀,국,사였다.
-불국사 여행, 그 순결한 기억 한 컷
불국사에서 사진을 가장 많이 찍는 장소는 어디일까? 조사를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역사 교과서와 같은 책에서 제일 많이 본 사진은 정면의 좌측에서 우측으로 비스듬히 찍은 장면이다. 이 시의 스토리도 그 한 장의 사진에서 기인한다. 시적 화자는 아시아 어느 나라 출신의 어머니다. 이 시는 그녀가 청자인 딸에게 “아주 유명한 절”에서 찍은 사진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청운교와 백운교, 연화교와 칠보고, 범영루가 소나무를 배경으로 서 있는 그 앞에서 “열댓명”의 처녀 총각 노동자가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그 때 시적 화자는 꽃다운 처녀였다. 사진 속에는 그녀를 사랑했던 현재의 남편도 있었나 보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사기 위해 ‘불국사 관광기념’이라 찍혀있는 수건 한 장을 선물했다. 그게 그녀의 마음을 뛰게 한다. “네 아빠가 사준 것이라서/한 번도 안 쓰고 넣어둔/수건 한 장”이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그 순간의 감격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말하자면 그 “수건 한 장”은 그녀를 향한 그의 프로포즈였던 셈이다.
그 기억 앞에서 아직도 그녀는 수줍어한다. 우리 삶에도 가끔 그런 설레는 ‘기억’은 봉인을 뚫고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건 어떤 날을 다른 날과는 다르게, 어떤 시간을 다른 시간과 다르게 만드는 더럽히고 싶지 않은(“한 번도 안 쓰고 넣어둔”) 기억이다.
절 이름을 묻는 딸에게 그녀는 ‘수건’을 통해 그곳이 불국사였음을 확인한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그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라는 노래처럼, 절 이름은 잊었지만 그 순간만은 그녀의 생에서 언제나 살아 있는 것이다. ‘풀국사’로의 여행은 그녀에게 타국살이의 고단함을 달래준, 무엇보다 그의 고백을 들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풀,국,사’. 이 이국식 발음은 이 시의 리얼리티를 선명하게 확보하게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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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은 시인 약력
경북 안강 출생. 198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5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 저서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외 7권, 1996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경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