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지방에 6세기경 조성된 세계 최대의 석불이 있었다. 이 석불은 그리스 조형 미술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양식으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도 언급이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불상은 안타깝게도 2001년 3월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운 탈레반 정권에 의해 로켓탄으로 파괴되어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 경주에도 규모는 이에 미치지 못하지만 엄청나게 많은 불상 파괴가 있었다. 해방 이후 분황사는 현재와 같이 금당터 뒤 북쪽에 담장이 있었다. 분황사 담장과 북천 제방 사이는 원래 밭이었다. 1963년경에 이 밭을 논으로 만들었는데 다음 해인 1964년 7월에 논의 물이 계속 한곳으로 쏠려 빠져나갔다. 논 주인이 이상히 여겨 파 본 결과 괴석들이 나오고 땅 아래가 쿵쿵 울리므로, 혹시 유적이 있는 것이 아닐까하여 그 해 12월경에 국립경주박물관에 신고를 하였다. 박물관에서는 현장 답사를 한 뒤 지하에 석실고분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하였다. 이에 문화재관리국에서 1965년 12월 21일부터 5일간 발굴을 해본 결과, 지표아래 약40cm 지점에서 석불 한 점이 출토되었고 이어서 지름 2m정도의 범위 내에서 계속 석불들이 나왔다. 석불을 캐내면서 주변 석축들의 형태를 살펴보니 그것은 돌로 짠 우물이며 석불은 이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우물 깊이 2.6m 지점에서 마지막 석불이 출토되었는데 석불들은 대부분 목이 잘린 채로 발굴이 되어 누군가에 의해 고의로 훼손되어 우물 속에 던져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때 출토된 석불은 좌불상 13기, 보살 입상 1기, 불두 5기, 광배 1점, 기타 6점이었으며 모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관하여 보존 전시되고 있다. 누가 왜 불상들의 목을 잘라 우물 속에 빠뜨렸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이에 대해 외침, 지진, 종교 갈등 등이 그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먼저 몽골병란, 왜란, 호란과 같은 전란에 의해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불상을 파괴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모아 우물 속에 던졌다는 것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과는 맞지 않는다. 큰 지진이 나면 대좌 위에 있던 불상이 굴러 떨어지는데 가장 약한 부분인 목이 떨어지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경주지역에 지진이 자주 발생했지만 안전한 받침대 위의 석불이 떨어질 정도의 강진이 있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우물 속으로 불상을 집어 던져 묻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일부러 불상을 훼손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간혹 땀을 흘리는 불상에 대한 기록들이 있는데 이런 일이 있으면 유생들은 세상을 현혹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불상을 파괴하였다. 목불은 불태워지고 석불이나 금동불은 우물이나 저수지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분황사 우물 속에서 발견된 불상도 조선시대 이와 같은 원인에 의하여 훼손된 후 버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분황사의 본래 사역은 현재보다 훨씬 더 북쪽으로 뻗고 있었으며 불상군이 출토된 우물의 위치는 현재 금당지 뒷담에서 약 33m 떨어진 지점으로 후일 분황사 발굴조사 결과 지금 북쪽 담장 뒤편에 분황사의 강당지가 있고 석불이 발견된 우물은 금당지에서 서북쪽 가까운 곳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이 훼손된 많은 불상들이 모두 분황사에 있었던 것으로는 믿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많은 불상은 본래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왜 하필이면 분황사 우물 속에 던져졌을까? 또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에는 이곳 분황사에서 출토된 석조관음보살 입상, 석조비로자나불 좌상, 석조불좌상 등 3점의 불상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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