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11월 24일 경주시 성건동 186번지에서 김임수씨를 부친으로 허임순씨를 모친으로 출생했다. 어릴적 이름은 창봉으로 본명은 창귀, 자(字)는 시종으로 짓고 문학의 길을 걸을때는 동리라 하였는데 일생을 동리라 불리었다.
1929년 중외 일본에서 시 및 수필을 발표하고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입선 193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가 당선되고 다솔사와 해인사를 오가며 작품에 몰두하셨다. 그 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가 당선되고 단편 등 수 편을 발표하였다. 서라벌예대 교수 예술원 회원, 유네스코 위원으로 피촉되고 1955년 , 시대로 자유 문학상을 수상 하셨다. 1973년 중앙대 예술대 학장 및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78년 장편소설 를 발표하였다. 을화는 노벨문학상 본선에 진출하였다.
1983년 한국문인협회이사장 대한민국예술원 원로회원을 하셨으며 시집 은 마지막으로 뇌졸중으로 쓰러지시며 1995년 6월 17일 23시 영면하시었다.
동리 선생이 자란 곳 성건동의 주위는 선생의 문학배경을 만들어준 곳이기도 하다. 경주읍성으로 보면 서문 서천으로 열려있고 조금 북쪽으로 치우쳐 둥근 울책으로 둘러진 옥사(獄舍)가 있었고 사형당한 죄수의 수급이 대창에 달려 서문 앞에 있었을 것이다. 거대한 회나무의 거목이 서문 밖 길 길가에 긴 팔을 벌리고 있고 장승들이 줄을 서있던 장승배기가 있었으며 삼랑사 폐사도 있어 빈 당간지주가 서 있고 도살장도 있던 곳이었다.
그리고 강가엔 소시장들이 있어 막걸리를 마시는 목로주점이 만들어져 있었고 소털이 날리는 장터에 큰 솥에 국밥을 끓여 팔고 강가의 뚝변엔 밀과 보리가 한없이 자라던 곳이었다. 동리선생 동시에도 있듯이 ‘나는 오랜 옛 서울의 한 이름없는 마을에 태어나’ 이 마을을 성건리는 읍성의 바깥에 있다 하여 성 밖 동네라 불리었다.
소년 동리가 즐겨 놀던 곳 김유신 장군 묘소가 있는 부험듬과 송홋골, 금산재 근처 늪이 있고 과 라는 수필집도 있는 동네, 선도산 골짜기엔 작은 샘이 흐르고 무녀들이 기도를 올리고 살풀이를 추며 신탁(神託)하던 곳.
그리고 남쪽 기린천에서 흘러내리고 황용산에서 알천으로 문천에서 기린천으로 흘러 모여 금장대의 소와 연결하여 동해에 흐르는 형산강이 시작되고 이곳 바위 고대인의 암각화도 새겨진 제를 올리던 곳. 그 벼랑아래 깊은 소가 있다. 현곡에서 구미산으로 오르는 길 그 안쪽에 수운선생 용담정이 있어 동학과 시천주 우리의 고유신앙이 새롭게 일어난 곳. 장윤익 선생은 ‘동학과 동방사상은 시천주와 풍류도 화랑정신을 바탕으로 우리의 고유신앙을 새롭게 정립한 독자적인 민족사상이며 동리는 이것을 자신의 문학사상으로 받아들여 샤머니즘의 세계를 추구한다. 동리는 쇠잔해가는 샤머니즘과 화랑후손들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고 “동학사상”, 동방사상을 수용한다고’ 했다.
, , , , , , , , 등 대부분 동리소설은 ‘동방사상과 샤머니즘, 신인간新人間’주의를 중심과제로 삼는다.
이러한 무녀도의 모화와 그의 딸 낭이가 놀던 곳 ‘모화는 주막에서 술을 먹다 말고 화랑이(박수)들과 어울려서 춤을 추다 말고 별안간 미친것처럼 일어나 달아나곤 했다. 물으면 집에서 따님이 자기를 부르노라 했다’ 선도산, 김유신 묘, 금장대, 현곡 구미산 골자기의 배경이 동리의 소설에 배경이 되어 그곳에 빠져들게 한다. 우리 소년시절 금장대에서 떨어져 죽은 자의 혼을 무녀가 건지는 모습을 보았다. 신에게 끝없는 넋두리와 울음 그리고 물속으로 잠겼다가 건져지는 호리병, 태평소, 피리, 북, 장고이던가 음율과 가락을 따라 무녀의 넋두리는 알듯 말듯 노래했고 이러한 풍경이 동리소설 배경에 깔려 있었다. 을화는 우리나라 최초로 노벨문학상 본선 후보에 오르고 선도산은 붉은 노을에 잠긴다. 이 동리 소설의 무대가 펼쳐진 길을 따라 철로가 달리고 현곡의 언저리에 서경주역이 있다. 서경주. 얼마나 사무적인 이름인가. 문화도시에선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 소설의 거목의 산실로, 동리의 소설 세계로 새로운 문화마을이 태어나길 기원하며 동리역으로 불리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