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경전에 ‘맹구부목(盲龜浮木)’이라는 비유가 있다. 망망대해에서 한량없이 오래 사는 눈먼 거북이가 있는데 백 년마다 한 번 숨을 쉬기 위해 물 위로 오른다고 한다. 바로 그때 바다 위를 떠다니는 구멍 뚫린 나무판자에 이 거북이가 머리를 들이밀게 되는 확률만큼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사람으로 태어나 부처님 계신 세상을 만나는 것은 이 보다 더 어렵다는 것이다.
원효 큰 스님은 신라 불교의 새벽을 열고 생사를 한길로 벗어난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으로 서민들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선 분이었다. 또한 그는 심오한 불교의 이치를 통찰하여 100여부 240여 권의 초인적인 저술을 하였다. 원효 이전에도 원효 이후에도 이와 같이 위대한 스님은 없었다. 따라서 ‘맹구부목’은 스님의 출현에 딱 맞는 표현이 아닐까?
전국에 걸쳐 원효와 관련이 있는 사찰이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중 이곳 경주에는 분황사를 비롯하여 황룡사, 고선사 등이 있다. 황룡사는 왕을 비롯한 고승들이 구름같이 모인 자리에서 금강삼매경을 강설하였고 고선사에 주석하고 있을 때에는 사복(蛇福)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다는 사실이 『삼국유사』 「의해」편에 기록되어 있다.
분황사는 원효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는 사찰이었다. 창건 당시의 주지는 자장율사였으나 다음에는 원효대사가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금광명경소』 등의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가르침이 분황사를 중심으로 하여 널리 퍼지게 됨에 따라 분황사는 법성종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법성종은 분황종이라고도 한다. 이후 스님이 입적하자 아들 설총이 소상을 만들어 안치하였고, 고려 때에는 의천이 제문을 지어 원효를 추모하는 제를 올리고, 숙종 임금은 ‘화정’이라는 시호를 내리기도 했다.
최근에는 분황사 내에 ‘원효학연구원’을 두고 있으며 매년 그 분의 업적을 기리는 예술제와 각종 세미나 등을 개최하고 있다.
『송고승전』 「원효전」에는 원효스님과 관련한 여러 일화를 전하고 있다.
한번은 왕비가 병을 얻어 의원도 고치지 못하자, 사신을 당나라로 보내 그 치료방법을 찾아오게 하였다. 사신이 남해 바다를 지나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서 용궁으로 사신을 데리고 갔다. 용왕이 순서가 흩어진 경전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대안(大安)성사로 하여금 차례를 매기게 하고, 원효법사를 청하여 주석을 지어 강론하게 하면, 왕비의 병이 낫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을 것이다.”
사신으로부터 경전을 전해 받은 왕이 대안을 불렀다.
“경전만 가져오십시오. 궁궐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대안선사가 이렇게 말하고 경전을 받아 배열하여 여덟 품(品)을 만드니, 모두 부처님의 뜻에 합치하였다.
“빨리 경전을 원효에게 주어 강론하게 하십시오. 다른 사람은 안 됩니다.”
경전을 받아든 원효가 말했다.
“이 경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두 가지 깨달음을 종지로 삼고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소가 끄는 수레를 준비하여 책상을 두 뿔 사이에 두고 붓과 벼루를 놓아 주십시오.”
원효는 시종 소가 끄는 수레에서 주석[소(疏)]을 지어 다섯 권을 만들었다. 이후 날을 정하여 황룡사에서 설법하기로 하였는데, 이를 도둑이 훔쳐갔다.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어 사흘을 연기하여 다시 『약소(略疏)』 세 권을 만들었다.
원효가 설법을 하게 되자 왕과 신하, 승려와 속인에 이르기까지 법당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스님의 명쾌한 설법에 모든 사람들이 경탄을 하였다.
이에 원효가 소리 높여 말하였다.
“예전에 백 개의 서까래를 고를 때에는 내가 그 모임[백고좌(百高座)]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오늘 한 개의 들보를 놓는 곳에서는 나만이 할 수 있구나.”
지금까지 원효는 출신이 변변하지 못하다하여 늘 황룡사 법회에 참석을 거부당했던 것이다. 원효의 호통에 당시 고승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진심으로 참회하였다고 한다.
동래군 불광사 척판암사적비와 천성산 내원사 안내판 및 『송고승전』 등에 원효스님과 관련한 또 다른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중국 장안성의 종남산 기슭에 운제사라는 절이 있었다. 승려 천여 명이 예불을 드리고 있었는데, 대웅전 들보가 썩어 무너지게 되었다. 이에 원효대사가 위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옆에 놓여 있는 소반에다 ‘해동원효척반구중(海東元曉擲盤救衆)’이라는 여덟 자를 적어 힘껏 던져 천여 명의 승려를 구하였다. 이후 원효의 가르침을 받고자 중국에서 많은 승려들이 찾아왔으며 그들이 머문 산에서 천명의 성인이 나왔다. 그 산이 바로 경상남도 양산에 있는 천성산(千聖山)이며, 당시 원효가 여덟 자를 적은 소반을 던졌던 곳에 암자를 지어 척판암이라 하였다.
이외에도 『삼국유사』 「의해」편에 있는 요석공주와 관련된 이야기를 비롯하여 스님에 관한 많은 일화가 여러 문헌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