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 -프랑시스 잠 우리 집 식당에는 윤이 날 듯 말 듯한 장롱이 하나 있는데, 그건 우리 대고모들의 목소리도 들었고 우리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고 우리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은 것이다. 그들의 추억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장롱, 그게 암 말도 안 하고 있다면 잘못이다. 그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까. 거기엔 또 나무로 된 뻐꾹시계도 하나 있는데, 왜 그런지 소리가 나지 않는다. 난 그것에 그 까닭을 물으려 하지 않는다. 아마 부서져 버린 거겠지. 태엽 속의 그 소리도. 그냥 우리 돌아가신 어르신네들의 목소리처럼. 또 거기엔 밀랍 냄새와 잼 냄새, 고기 냄새와 빵 냄새 그리고 다 익은 배 냄새가 나는 오래된 찬장도 하나 있는데, 그건 우리한테서 아무것도 훔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충직한 하인이다. 우리 집에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이 왔지만, 아무도 이 조그만 영혼들이 있음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나는 빙긋이 웃는 것이다. 방문객이 우리 집에 들어오며, 거기에 살고 있는 것이 나 혼자인 듯 이렇게 말할 때에는 ―안녕하신지요, 쟘 씨? -손때 묻은 기물에 밴 추억과 정신 시인은 식당에 놓인 가구와 기물들을 둘러본다. 그에게 그들은 집의 내력을 알고 있는 존재이며, 세대에서 세대로 유유한 걸음으로 전해지는 생명이자 의식이다. 시인은 그 은밀한 걸음을 알고 있다. “윤이 날 듯 말 듯한 장롱”은 우리 조상들의 목소리를 들은 존재이고, 나무 뻐꾹시계는 “돌아가신 어르신네들의 목소리” 가 들리지 않듯이 소리를 멈추었다. 또 정다운 음식 재료 냄새가 나는 오래된 찬장은 “우리한테서 아무것도 훔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알고 있는 충직한 하인”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아무것도’라니? 그것은 바로 추억과 전통의 세목들이다. 밀랍과 잼, 고기와 빵, 그리고 다 익은 배 냄새는 찬장에 배어 있다. 마찬가지로 여러 세기에 걸쳐 쌓인 풍속과 정신적인 유산, 그리고 전통들은 우리의 몸과 핏줄에 배어 있어서 누구도 훔쳐갈 수 없다. 시인에게 사물은 선명한 추억의 자리거나, 그 이전의 사건이나 일화를 거느리면서 기억의 원초적 중심으로 기능한다. 우리는 현재의 사물을 통해 세계와 우리 자신의 뿌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 때 우리 생 체험의 깊이와 실감도 더해진다. 그러나 가구의 그런 깊이를 모르는 타자들은, 나와 대화를 하는 이들 성숙하고 내밀한 영혼들에게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이 때 “나는 빙긋이 웃어” 줄 뿐인 것이다. 마치 존재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함부로 지껄이지 않는다는 듯이. 잠은 영혼이 참 맑은 시인이다. 잠이 가진 정서와 감각은 인간의 감정 밑바닥에 존재하는 것이어서 일반인 모두가 공감할 수가 있다. 어디 값나가고 세련됐으면 최고인가? 편리만 추구하는 우리들에게 오늘은 오래된 가구의 묵은 향내를 맡아보라고 이 시는, 은근히 우리의 소매를 당기고 있다. ---------------------------------------------------------------------- 손진은 시인 약력 경북 안강 출생. 198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5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 저서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외 7권, 1996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경주대 교수.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