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철학인가요? 종교인가요?’ 누군가 불쑥 물어옵니다. 불자(佛子)라면 누구라도 한 번씩은 들어봤을 겁니다. 저도 가장 많이 들어본 질문이기도 하고요…. 적어도 저희 어머니한테 불교는 종교입니다. 어느 해 가족 중에 가장 똑똑하다는 막내아들이 대학 시험에서 떨어졌지요. 어머니는 향초와 알 굵은 과일을 바리바리 싸들고는 정성을 다해 빌면 소원 한 가지는 꼭 들어주신다는 일명 갓바위 부처님(관봉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31호), 경산 팔공산 소재)께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 정성이 갸륵했던지 아들은 다음 해 원하던 대학에 합격을 하고 어머니에게 불교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 아들은 화답이라도 하듯 불교 학자가 되었습니다. 손에 든 책은 죄다 한문이나 옛 인도말 투성이고, 눈은 몇 천 년을 켜켜이 쌓아올린 학문적 성과물에 가닿아 있습니다. 그에게 불교는 철학입니다. 아들은 어머니가 너무 촌스럽다고 핀잔하고, 어머니는 공부만 하는 아들이 점점 인간미가 없어졌다고 탓하십니다.
여기서 잠시 옆길로 빠져볼까요. 재판을 맡은 판사가 쉬는 틈에 기자들이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형량이 3년 이하입니까?” 하는 기자의 전화를 받은 판사들은 평균 33개월의 징역형을, “형량이 1년 이하인가요?” 하는 전화를 받은 판사들은 평균 25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했다는 재미난 실험이 있습니다.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툭 던진 질문이었지만 판사 마음속 어딘가에서 이것이 기준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마치 닻(anchor)이 내려앉은 것처럼 말이죠.
판사한테만 허락된 전문 영역에서 무의미한 조건이 결과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겁니다. 의외의 전화 한 통이 판사 머릿속 깊숙이 박혀버린 거지요.
다시 질문으로 돌아옵시다. 불교가 철학인지 종교인지에 대한 질문에, 개학하면 꼭 제출해야 할 방학숙제마냥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불교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도 어려운데 철학이나 종교를 집어넣어 하라니 더욱 그렇습니다. 이것도 앵커링(anchoring, 닻 내림 효과)효과 때문이라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 고민해서 내놓는 답은 ‘종교다, 아니 철학인가?, 종교이면서 동시에 철학이다!’ 하는 세 가지 범주만 맴돌 뿐입니다. 어떤 대답도 요즘 말로 사이다처럼 시원하지 않습니다. 종교라고 하기엔 철학적인 부분도 있고 반대도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두 개 모두 다 라고 타협하는 게 그나마 나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이렇게 보면 어떨까요. ‘불교’를 개구리로, ‘철학’을 심장으로, ‘종교’를 창자로 바꾸어 보는 겁니다. 비유가 좀 뭐 하지만, 어차피 불교가 뭔지 묻는 것이나 개구리가 뭔지 정의하는 것이나 맥락은 같기 때문입니다.
개구리에 대한 정의는, 개구리는 어떻게 생겼고 무엇을 먹으며 어디서 노래하고 사는지 물어보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파리가 날아오면 뒷다리를 팽팽하게 도약하며 동시에 혀를 날름거리는, 그런 ‘살아 움직이는’ 개구리를 알고 싶으면 창자나 심장은 그 속에 가만 둬야지 그걸 꺼내거나 나누려는 순간 개구리는, 다시 말해 불교는 정의내릴 수 없게 됩니다. 살아 숨 쉬지 않은, 죽은 것이니까요. 초등학교 과학실 포르말린 용액에 들어있는 개구리를 떠올려 보시면 좋겠네요.
굳이 종교나 철학으로 ‘나누어’ 놓고 불교의 그 ‘온전한’ 모습을 물을 이유는 없습니다. 철학과 종교만으로 불교를 설명해야 할 강박도 터무니없지요. 무엇보다 질문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이런 가짜(psudo) 질문에 대답을 할 의무는 더더욱 없습니다. 이참에 불교의 정의에 대해 제대로 물어보는 게 어떨까요. ‘당신 속에 살아있는 불교는 어떤 모습이고 어떤 느낌인가요?’
흔히 애들을 보면 “엄마가 좋니? 아빠가 좋니?”하고 물어보잖아요? 그러지도 말자구요. 애들이 대답은 않고 눈만 깜빡거리는 건 정답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엄마, 아빠를 그 온전한 모습으로 지켜주고 싶어서 머뭇거리는 거니까요.
어린이날 지나고 바로 부처님오신날이라니 왠지 여유로운 5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