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 모전석탑과 보광전 사이에 우물전이 통돌로 된 우물이 있다. 겉은 8각형이고 안은 원형으로 되어 있다. 이 우물은 신라 때 만든 우물로서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절 부근의 마을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하고 있었다. 필자도 유소년시절 이 물을 마시며 자랐다. 안전을 위해 입구에서 약 1m 아래에 그물망을 설치했다가 지금은 나무판으로 막아두었다. 이 우물물은 여름에는 차고 가을이 되면 경내의 그 많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이 우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 신기해하던 우물이었다.
이 석정은 신라시대의 우물 중에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가장 아름다운 우물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화강암으로 된 틀의 외부가 팔각이고 높이는 70cm, 내부는 위가 원형, 아래가 사각으로 되어있다. 윗부분의 일부가 약간 파여져 있어 이를 두고 파손이 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물을 길어 올릴 때 두레박을 놓는 자리였을 것으로 보인다.
우물전 외부의 팔각은 불교의 팔정도(八正道), 안쪽의 원모양은 원융(圓融)의 진리를 의미하며, 우물 안 아래의 4각형 격자는 불교 근본 교리인 사성제(四聖諦)를 뜻한다.
팔정도는 불교 수행에서의 8가지 올바른 길로써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념(正念)·정정진(正精進)·정정(正定)을 말한다. 불교를 믿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팔정도에 의하여 수행하고 생활하도록 되어 있다. 팔정도는 욕락과 고행 등의 극단을 떠난 중도(中道)이며, 올바른 깨침으로 인도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이고 완전한 수행법으로 되어 있다. 원융이란 모든 현상이 각각의 속성을 잃지 않으면서 서로 걸림 없이 원만하게 하나로 융합되어 있는 모습으로, 아무 차별이 없고 원만하여 서로 막히는 데가 없음을 뜻한다.
사성제는 사제(四諦)라고도 하며 고(苦)·집(集)·멸(滅)·도(道)의 네 가지 진리로 구성되어 있다. 사제설은 인연설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체계를 세운 법문이다.
이 우물에 대해 『삼국유사』 「기이」편에 다음과 같은 설화를 전하고 있다. 신라 38대 원성왕이 즉위한지 11년 을해(795년)에 당나라 사신이 서울에 와서 한 달 동안 머물고 돌아 간지 하루 만에 두 여자가 대궐 안뜰에 찾아와서 이렇게 아뢰었다.
“저희는 동지(東池)와 청지(靑池)에 사는 용의 아내입니다. 하서국 사람들이 와서 저희들의 남편인 두 용과 분황사 우물에 살던 용까지 호국용 세 마리에게 술법을 써서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통에 넣어 가버렸으니 청컨대 남편을 저희들 곁으로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
동지는 궁궐 안 연못이고, 청지는 금학산 기슭에 있던 동천사의 샘으로 이 샘을 통해 동해용이 왕래하면서 법문을 듣던 곳이다. 두 여자의 말을 들은 왕은 하양관 까지 쫓아가 친히 잔치를 베풀고 하서국 사람들에게 칙명을 내렸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세 용을 잡아 이곳까지 왔느냐? 만약 사실대로 아뢰지 않으면 반드시 극형에 처하겠다”
이에 당나라 사신이 놀라 곧 물고기 세 마리를 꺼내 바침으로 세 곳에 각각 놓아주도록 하였더니 저마다 물에서 한 길이나 기뻐 뛰며 각기 다시 물속으로 사라졌다. 이를 본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명철함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지금 분황사 석정을 호국용이 물고기로 변했다고 하여 호국용변어정(護國龍變魚井) 또는 삼용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삼용변어정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용 3마리가 모두 이 우물 속에 살았던 것이 아니고 한 마리만 이 우물에 있었던 것이다. 이 석정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