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밥 -송재학 초록이 밀사를 보냈다네 그 왕국은 아직 선포되지 않았지 며칠 전 이 늪은 고요하기만 했었네 지금 초록은 물에 비치는 푸르름만으로 한껏 울지 못하겠다고 마침내 밀사를 보내 수면에 제 왕국의 흥망을 빽빽하게 펼쳤네 수많은 초록이 물 위에 한껏 게을러졌다네 이것을 개구리밥이라고만 부르지 말라 수줍음처럼, 또렷하게 작은 꽃이 핀다네 그들이 초여름의 날랜 병정들이라네 -여름왕국의 밀사, 개구리밥 초여름이 오는 것을 그대는 무엇으로 아는가. 제법 짙어진 신록들의 푸르름? 아니면 짧아진 치마와 소매? 그것도 아니라면 상점마다 가득 쌓이는 얼룩말 무늬 수박과, 입에 문 아이스크림? 여기 계절의 변화를 새로이 감지해내는 시인이 있다. 왕국의 밀사, 개구리밥의 도착을 기점으로 시인은 여름을 읽어낸다. 봄까지 지속되어온 물에 비치는 하늘이나 산봉우리의 푸르름만으로도 개울이나 무논, 늪은 충분히 아름답고 고요했다. 그러나 초록왕국은 그것만으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아 밀사를 파견하고, 마침내 봄날의 고요와 청명(淸明)을 하나씩 하나씩 지워나간다. 마침내 초록왕국은 “수많은 초록이 물 위에 한껏 게을러”지는 자신만의 “왕국의 흥망을 빽빽하게 펼”치는 것이다. 그러면 곧 “한껏 울어댈” 개구리들이 늪의 여름을 완성하는 것이겠지. 그러나 수면을 온통 뒤덮어버리는 그 작은 잎들은 떼를 지어 무덤덤하게만 존재하지 않는다. 섬세한 그물 모양 잎맥으로 한 포기의 개구리밥은 “수줍”게 연한 뿌리를 물속에 감추고 “또렷하게 작은 꽃”처럼 피어 있다. 그 개별자들은 각각 바람과 물의 움직임에 떠다니며 따로 움직인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개구리밥이라고만 불러서는 안 된다. “초여름의 날랜 병정”이라 불러야 한다. 작은 풀잎 하나로도, 자연은 언제나 부분과 전체의 오묘한 조화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임을 알겠다. 손가락으로 꼽아보니 곧 무논이나 늪에 그 초록의 밀사가 당도하겠다. ----------------------------------------------------------------------- 손진은 시인 약력 경북 안강 출생. 198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5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 저서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외 7권, 1996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경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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