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이 진행 중인 월성(사적 제16호) 서쪽 성벽에서 1500년 전 사람을 제물로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 2구가 나왔다.
성벽유적에서 인골이 출토된 것은 국내서는 최초다. 또 월성해자에서 ‘소그드인’으로 추정되는 토우 중 가장 이른 시기인 6세기로 판단되는 유물과 ‘병오년(丙午年)’이라고 기록돼 정확한 연대가 최초로 확인된 목간도 발굴됐다.
지난 16일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이종훈)는 지난해 3월부터 진행 중인 경주월성 정밀발굴조사의 중간 조사결과를 공개했다.
월성 총면적 22만2000여㎡를 A, B, C, D 등 4개 지구로 나눠 발굴 조사 중이며, 이날 월성 서편지구인 A지구의 문지·성벽과 해자에 대한 발굴조사 중간결과를 발표한 것.
연구소는 5세기 전후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쪽 성벽 기초층에서 하늘을 향해 정면으로 똑바로 누워있는 인골 1구와 얼굴과 팔이 이 인골을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인골 1구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2구의 인골은 모두 얼굴을 중심으로 나무껍질과 초본류가 덮여진 채로 발견됐는데, 이는 사람을 묻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덮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연구소는 △인골이 성벽을 본격적으로 쌓기 직전인 기초층에서 출토된 점 △인골이 누운 방향이 성벽 축조 진행방향인 동북쪽과 일치하고 있는 점 △인골 주변 별도의 매장시설이 발견되지 않은 점 등을 들어 사람을 제물로 사용한 제의의 흔적으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또 두 인골은 결박이나 저항 흔적이 없고 가지런히 누운 점으로 미뤄 사망한 뒤에 묻힌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인골이 확인된 국내 사례는 월성이 최초다.
사람을 기둥을 세우거나 주춧돌 아래 묻으면 제방이나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인주(人柱) 설화가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실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셈이다.
주거지 혹은 성벽의 건축과정에서 사람을 제물로 사용한 습속은 고대 중국(1600~1000년경, 상(商)나라)에서 성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서는 고려사에 충혜왕 4년(1343년)에 ‘왕이 민가의 어린아이를 잡아다가 새로 짓는 궁궐의 주춧돌 아래에 묻는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연구소는 두 인골 중 정면을 바라보고 누운 인골은 신장 166cm의 남성으로 확인됐고, 다른 인골은 159cm로, 정확한 성별은 조사 중에 있다. 또 인골이 묻힐 당시 나이는 성인으로 판단하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이인숙 연구사는 “높이 9m 정도 성벽을 절개해 조사를 시작했는데 절묘하게 인골이 발견됐다. 성벽을 본격적으로 쌓기 직전 기초부 상부에서 확인되는 등 여러 가지로 미뤄 제물로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향후에도 인골 출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성벽 발굴이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또 연구소는 이들 인골을 대상으로 성별·연령 등을 확인하기 위한 체질인류학적 분석과 DNA 분석, 콜라겐 분석을 통한 식생활 복원, 기생충 유무 확인을 위한 골반주변 토양분석 등을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 인골에 대한 연구결과에 따라 당시 사람들의 체질적 특성, 인구구조, 식생활, 유전적 특성 등 다양한 생활상을 더 자세히 파악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편 이번 서쪽 성벽은 5세기 처음 축조돼 6세기에 최종적으로 보수된 것으로 확인됐으며, 문이 있던 자리는 이미 유실된 것으로 확인됐다.
또 월성 성벽은 흙으로 만든 토성이며, 성질이 다른 흙을 서로 번갈아 가면서 쌓아올리는 성토(盛土) 기술로 축조했다. 성벽 최상부에는 사람 머리 크기만한 돌이 4~5단 가량 무질서하게 깔려 있었다. 이는 흙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한 기능으로 보이며, 월성의 특징 중 하나라고 연구소는 설명했다.
-수혈해자에서 석축해자로 변화하며 500년 동안 사용
월성 북쪽면에 길게 늘어서 있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못인 해자(垓子)에 대한 내부 정밀보완 조사 결과 약 500년 동안 수혈해자에서 석축해자로 변화하며 지속해서 사용됐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
연구소 따르면 ‘수혈해자’는 월성 성벽을 둘러싼 최초의 해자로, 성벽 북쪽에 바닥층을 U자 모양으로 파서 만들었으며, 해자 가장자리가 유실되거나 이물질을 막기 위한 판자벽을 세웠다.
판자벽은 약 1.5m간격 나무기둥을 박고 두께 약 5cm의 판자를 세우는 방식으로 조성했다.
‘석축해자’는 수혈해자 상층에 석재를 쌓아올려 조성했으며, 독립된 각각의 해자는 입·출수구로 연결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소는 해자는 시간이 가면서 다시 쌓거나 보강하면서 폭이 좁아졌으며, 내부 토층별 출토 유물을 분류해본 결과 수혈해자는 5~7세기, 석축해자는 8세기 이후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또 월성 성벽과 해자의 조성 순서를 확인한 결과, 성벽을 먼저 쌓고 이후 최초의 수혈해자를 팠던 것이 확인됐다. 이후 성벽과 해자를 다시 쌓거나 보수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성벽 경사면에 해자의 석축호안을 쌓는 등 유기적으로 축조했던 것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소그드인 추정 ‘터번 쓴 토우’ 출토
연구소가 이날 공개한 북쪽 해자에서 출토된 독특한 모양의 토우(土偶)와 목간 등은 월성의 역사적 가치를 입증했다. 흙으로 사람과 동물 등 다양한 형상을 빚은 토우들이 출토됐는데 이 중 터번을 쓴 토우가 주목받았다.
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토우는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소매가 좁은 이슬람문화권 의상인 카프칸이 허리가 꼭 맞아 신체 윤곽선이 드러나고 무릎을 살짝 덮은 모양이다.
이는 당나라 시대 호복(胡服)이라고 불리던 소그드인 옷과 모양이 유사해 페르시아 복식의 영향을 받은 소그드인으로 추정된다는 것. 소그드인은 중앙아시아에 살던 이란계 주민을 지칭한다.
연구소 관계자는 “터번 쓴 토우는 6세기로 추정돼 현재까지 출토된 소그드인 추정 토우 중 가장 이른 시기로 판단된다”며 “황성동, 용강동 석실분에서도 발견된 바 있는데 이보다 시기가 더 앞선다”고 설명했다.
-해자 내 정확한 연대 기록한 ‘목간’ 최초 출토
이번에 월성 해자에서 새롭게 발굴된 목간은 모두 7점. 이들 목간을 통해 목간 제작연대와 해자 사용 시기, 신라 중앙정부가 지방 유력자를 통해 노동력을 동원·감독했던 사실, 가장 이른 시기의 이두 사용 사실 등이 확인됐다.
연구소에 따르면 ‘병오년’(丙午年)이라는 글자가 적힌 목간은 그동안 월성해자 출토 목간 중 정확한 연대가 최초로 기록된 것이다. 이 목간의 작성 시점은 법흥왕 13년(526) 혹은 진평왕 8년(586)으로 추정돼 월성의 사용 시간을 확정할 수 있게 됐다.
또 경주가 아닌 지방민에게 주어지던 관직인 ‘일벌(一伐)’, ‘간지(干支)’가 적힌 목간에는 노동을 뜻하는 ‘공(功)’자가 함께 기록돼 있었다. 이에 대해 연구소는 당시 왕경 정비 사업에 지방민이 동원됐고, 이들을 지역 유력자가 감독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목간에 기록된 ‘백견(白遣)’은 ‘아뢰고’의 이두식 표현으로 신라 왕경 내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이두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삼국사기에는 등장하지 않는 관직명인 ‘전중대등(典中大等)’, 중국 주나라 주공을 모방해 이름지은 ‘주공지(周公智)’, ‘닭(鷄)’과 ‘꿩(雉)’ 등의 글자가 적힌 목간도 나왔다.
-희귀식물 가시연꽃 씨앗 가장 많이 발견
이외에도 월성해자에서는 신라시대 유적에서는 최초로 확인된 곰의 뼈를 비롯해 돼지, 소, 말, 개 등 동물뼈가 다수 출토됐다.
식물유체로는 산림청이 희귀식물로 지정한 가시연꽃의 씨앗이 가장 많이 발견됐고, 곡류, 채소류, 과실류 씨앗이 양호한 보존 상태로 나왔다. 목재유물로는 손칼과 작은 톱 등으로 정교하게 만든 얼레빗을 비롯해 목제그릇, 칠기 등 생활도구 등이 출토됐다.
이종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8~90년대 월성 해자와 유물지 조사 결과를 토대로 월성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들이 나왔지만 내부 정밀조사는 이뤄지지 않아 궁금증이 계속돼왔다”면서 “2015년 본격 발굴을 시작으로 조금씩 밝혀내고 있는 과정에 있으며, 이번 조사는 보다 많은 유물 출토로 월성에 대한 해석에 한 발짝 다가서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이 소장은 또 “발굴조사의 새로운 유형을 만들기 위해 정기적인 성과 공개, 대국민 현장설명회, 사진 공모전, 학생들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 등을 마련해 국민과 함께 발굴성과를 공유하고 꾸준히 소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문화재청은 월성에서 2014년 12월 개토제를 시작으로 3개월간 시굴을 한 뒤 2015년 3월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갔다. 3월까지 이뤄진 1년차 조사 때는 통일신라시대 건물터와 흙으로 빚은 벼루조각 50여 점이 출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