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하루 평균 마시는 공기의 양은 약15kg으로 하루 세 끼 식사량의 6배에 이른다. 요즈음 우리가 마시는 이 공기가 중국에서 건너온 황사와 공장과 자동차 등에서 발생하는 미세먼지로 오염되어 건강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해결할 뾰족한 방법이 없다. 분황사 약사여래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을까?
분황사 모전석탑 북쪽에 있는 보광전에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다. 약사여래는 동방유리광세계(東方瑠璃光世界)를 관장하며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한다. 보광전에서 약사여래와 마주 하려면 유리광세계가 있다는 동쪽을 향해야 한다. 그래서 보광전이 서향이다.
약사여래는 중생의 병을 치료하여 수명을 연장하고 의복·음식 등을 만족케 하는 등 12가지의 큰 소원을 세워 중생을 질병이나 고난으로부터 구제하려는 부처님이다. 그래서 한 손에는 약합을 들고 있는 상으로 표현한다.
약사여래의 좌우 협시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며, 권속으로 12지 신장을 거느린다. 이곳 분황사 보광전 약사여래는 입상으로 협시보살을 모시지 않은 단독상이다.
약사여래를 모시는 전각은 대개 약사전(藥師殿)·약광전(藥光殿)·만월전(滿月殿)·유리광전(琉璃光殿)이다. 그런데 분황사 약사여래는 보광전에 모시고 있다. 보광전이란 당호를 가진 법당은 그 예가 드물고, 있다고 하더라도 약사여래를 모신 곳은 이곳 분황사가 유일하다. 곡성 도림사와 남원 실상사 보광전에는 아미타 삼존불을 모시고, 상주 남장사 보광전은 비로자나불, 남해 보리암 보광전은 관음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있다.
『삼국유사』 「탑상」편 기록에 의하면 신라 35대 경덕대왕 때 강고내말이 분황사의 약사여래상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30만6700근이라고 했다. 훗날 이 불상은 몽고병란 또는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없어졌을 것이다.
1998년에 보광전을 보수할 때 발견된 기록을 통해 분황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1609년에 동 5360근으로 조성했다는 불상이 현재의 약사여래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처음 약사여래상은 이 불상보다 그 무게가 무려 57배에 이른다.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이다. 물론 그 사이 1근의 무게가 달라졌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처음 불상의 규모는 대단했을 것이다. 현재의 보광전은 1680년 5월에 개축한 것이다.
불상의 왼손 위에 놓인 약합 뚜껑 안쪽에 ‘건륭 39년 을미 4월 25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건륭 39년은 을미년이 아니라 갑오년으로 1774년이고, 을미년이 맞는다면 1775년이다. 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지금의 불상은 1609년의 것이 아니고 1774년 또는 1775년에 조성한 것이 된다.
창건 이후 분황사에는 오직 약사여래상 조성에 대한 기록만 있으니 분황사는 계속해서 약사여래를 주불로 모신 사찰이었을 것이다.
불상의 얼굴은 둥글고 표정이 어린 아이와 같고, 몸이 비대하여 세속적인 느낌을 준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두껍게 입고 있으며, 옷주름의 표현은 형식적이다. 손에는 약합을 들고 있어서 약사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약사여래상 앞에는 긴 판석으로 된 배례석이 있고, 그 아래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1층 탑신석으로 추정되는 받침돌이 있다. 이 받침돌의 네 면에는 장엄상이 새겨져 있다. 탑신석에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이 장엄상은 나풀거리는 옷자락에 인자하고 부드러운 인상으로 보아 사천왕상이 아닌 보살상인 듯하다. 어떤 이유로 탑신석이 불단의 받침석으로 사용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보광전 약사여래상은 전체적인 조형기법과 보광전을 보수할 때 발견된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조선 후기의 불상으로 추정되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