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르 불끈 쥔 주먹, 부르튼 입술, 서늘한 눈매에선 충의와 용맹한 기개가 넘친다. 바로, 용장이었던 임란의병 도대장 김호(金虎)장군(절충장군 부산진 첨 절제사 증 가선대부 형조참판)의 영정을 보면서다. 임진왜란 당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자 경주 최초로 창의한 의병장으로 장렬히 순절한 가선대부 형조참판 김호 장군의 불천위 사당에 영정을 모시는 봉안식을 가진다. 오는 14(일) 오후2시, 월암 김호종택(경주시 탑동 633)에서 오직 충의로 헌신한 김호 장군의 숭고한 정신을 길이 기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번 봉안식은 김호 장군의 업적에 비해 영정 하나 제대로 없자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이 힘을 합했고 허만욱 동국대 미술대교수가 영정제작을 맡았다. 봉안식은 김호 장군 영정제작 경과보고에 이어 김호장군 실기 소개, 영정봉안 고유제, 강신 / 참신 / 제관재배(종손 영모), 고유문낭독(헌익)헌무 외 참례자들의 참례 순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김호 장군은 그 충절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차제여서 이번 영정 봉안으로 김호 장군의 업적과 생애가 더 정확하고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봉안식의 주최주관은 월암공영정제작추진위원회, 경주문화원,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며 경상북도, 경주시, 경주김씨종친회, 경주임란의사추모회, 경주신문 등이 후원했다. -“후손 30여 명 얼굴과 골격 분석하고 종합...의병 창의 주도한 기개와 정신성 살리려 노력” 경주문화원의 의뢰를 받고 혼신을 다해 이 영정을 제작한 허만욱 화백은 김호 장군의 전기와 관련 서적을 섭렵하고 후손 30여 명의 얼굴들을 분석하고 종합해 이미지를 도출해냈다고 한다. 의병장으로서 창의를 주도한 기개를 살려 일반적인 문인의 영정들과는 달리 표현했으며 의병장의 신산했던 흔적을 담으려 노력했다. 의병장에 적합하면서도 정신성을 강조한 의복으로 조합하고 처리했으며 사람의 실물 크기와 거의 유사한 크기로 제작했다. 상체와 얼굴을 부각해 표현한 것은 장군의 삶을 집약하고 초점을 맞춰 정신성을 부각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또 회화적으로도 완성도를 높였다는 평이다. 허 교수는 “두 주먹을 부르르 불끈 쥐고 강렬한 눈빛을 표현해 용장의 기개가 충만하도록 그렸다. 기존의 형식적인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그리려 했으며 전쟁중이었으므로 얼굴빛도 깨끗하게 표현하지 않았고 입술도 다소 부르트게 그려 세심하게 표현했다” “특히 신경을 썼던 부분은 손이었다. 손에서 표현되는 은유적 처리에 중점을 두면서 손의 표정에 주목했다. 이 부분이 가장 힘들었다”면서 묘사뿐만 아니라 감정이 표현되도록 그렸다고 했다. 한편, 소당 조철제 선생은 글을 썼다. 당시 조선시대 선비들의 서체로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김윤근 경주문화원장은 “살신성인해 나라와 백성을 위기에서 구하고 장렬히 순절한 김호 장군의 불천위 사당에 영정이 없음을 부끄럽게 생각하다가 관계기관의 도움으로 의법한 영정을 제작하게 됐다. 이 영정을 봉안하고 국난타계의 선봉자로 추모하고 기리고자 한다. 전국의 유명한 의병들의 영정 자료를 수집하고 후손들의 골격을 종합했다. 5년 간 공을 들여 이번에야 결실을 거둬 기쁘다”고 전했다. -김호 장군(1534~1592)...,임진왜란시 의병 일으켜 민심 안정 꾀하고 혁혁한 전과 올려 조선 중기 무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경주 부근의 각 군현을 돌아다니면서 민심의 안정을 꾀하고 적진을 공략하였다. 1592년 8월 경주노곡싸움에서 적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는 싸움을 벌이고 전사했다. 본관은 경주로 자는 덕원, 호는 월암(月庵)이다. 1570년(선조 3년) 무과에 급제하고 20년의 관직생활 끝에 하향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도대장에 임명된다. 경주 부근의 각 군현을 돌아다니면서 민심의 안정을 꾀하고 의병을 모아 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수시로 적진을 공략하여 적지 않은 전과를 올렸다. 노곡 전투를 위시해 여러 전투에서 대승리를 하고 왜적에 북상로를 차단하고 경상의 의병장들에게 큰 용기를 준다. 특히 경주성 탈환의 계기를 마련하였을 뿐 아니라 천년고도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는데 절대적으로 기여한다. 전곡과 전천 등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부산첨사에 제수되는가하면, 의병 1400여 명을 이끌고 경주 노곡에서 적군과 맞부딪쳐 많은 전공을 세웠다. 적군의 북상을 저지하다가 언양에서 진격해 온 약 500기에 달하는 적군과 싸워 적을 섬멸하였다. 그러나 그도 경주노곡싸움에서 큰 부상을 입고 전사한다. 이 싸움에서 의병은 경주 일원의 적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고, 끝까지 추격을 감행했다. 그 전과가 커 1758년(영조 34) 다시 형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이후에도 정려가 내려오며 불천위의 제사를 봉행 하도록 했다. 김호의 아들은 김이충, 김이관, 김이홍 등 세 명이었다. 세 아들 모두 충절과 기개가 높아 월암고택은 충의의 가문으로 이름이 높다. 1831년(순조31년) 남강사(南岡祠)를 창건해 향제를 행했으나 고종 5년(1868)에 금령으로 훼철됐다. 1934년에 난간 마을 입구에 월암재를 건립, 1976년에 월암 고택을 ‘김호장군생가’라는 이름으로 중요민속자료 34호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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