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 가까이 있는 대학에 봄나들이 간 지 며칠 안 지난 것 같은데 반팔을 입고 다녀야 할 정도로 덥다. ‘아, 그때 캠퍼스는 그야말로 벚꽃 천지였었는데...’ 봄비로 기력을 되찾은 꽃망울마다 상큼한 꽃이 만개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초여름이라니 세월 정말 빠르다. 하늘거리는 옷으로 한껏 멋을 부린 연인들은 이제 선글라스와 반팔을 입은 채 사진 찍느라 바쁘다. 자기 머리통보다 큰 솜사탕을 들고 있는 어린아이 눈에도 입가에도 웃음이 가득하다. 한마디로 ‘아, 행복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만한, 지금은 누가 뭐래도 아이들 세상 5월이다. 우리는 행복을 쫓아다닌다. 조금만 더 자고 싶다는 아이를 흔들어 깨워 학교에 보내는 것도 녀석이 더 행복하기를 바라서다. 다리를 쭉 편 채 엄지발가락을 잡아보겠다고 버둥대는 것도 아빠의 늘어난 뱃살을 줄여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다. 안 보는 사이 서로들 살쪘다며 엄살을 부리다가도 디저트로 나온 초콜릿 무스 케이크를 오물거리는 여대생 얼굴도 무척 행복해 보인다. 이렇게 행복이라는 감정은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문제는 행복한 상태에서 불현듯 ‘어?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하는 순간, 행복은 솜사탕 녹듯 사라지고 만다는 거다. 행복이 아무리 다양한 표정을 짓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하나의 얼굴로 수렴된다. 따뜻한 행복이 차갑게 식어버린 얼굴 말이다. 세속적인지는 몰라도 행복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 중 하나가 돈 문제다. 스코틀랜드에 스털링 대학이라고 있다. 거기서 어른 1만8000명을 상대로 소득 수준과 행복의 상관성을 조사해 보았다. 9년 동안을 지켜본 결과, 고소득자라고 해서 더 행복한 것은 아니더란다.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진행된 설문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월 소득이 563만 원 이상인 고소득층 중 무려 49.1%가 스스로를 빈곤층이라고 느꼈다고 해서 충격이다. 객관적으로 높은 소득이 주관적인 행복을 견인하지 못하는 것이다. 중산층은 그럼 얼마나 행복할까? 이들 역시 자신이 속한 소득 계층보다 스스로 더 낮은 계층에 속한다고 생각한다니, 소득과 행복감은 그다지 좋은 궁합이 아닌 모양이다. 불행(!)히도 소득 수준과 상관없이 누구나 돈 걱정을 하고 그 걱정은 추구하는 행복을 더 멀리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영국의 정신 병리학자 로저 헨더슨(Roger Henderson)도 같은 생각이다. 경제활동을 하는 대부분의 삶은 소득 수준과 상관없이 돈 걱정을 한다고 한다. 돈 걱정에서 벗어나고자 돈을 벌지만, 돈을 버는 한 결코 돈 걱정을 떨칠 수 없다나 어쨌다나. 그럼 절대 줄지 않는 행복, 어디 없을까?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솜사탕 같은... 혹시나 해서 지갑을 확인할 때마다 빠닥~한 오만 원 신권이 계속 불어서 골치 아픈... 그런 삶 말이다. 그런 완전한 삶과 불어나는 행복은 없다. 봄날이 저렇게 좋아도 없다. 청춘들의 까르르 대는 웃음이 저렇게 어지러운 대도 없다. 혼자 운전을 하거나 가끔 혼자 걸을 때 부르는 동요가 있다. ‘나에(의) 사~알던 고향은 꽃피는 산~꼬올’ 하고 시작하는 〈고향의 봄〉이다. 최근까지 왜 하필 그 동요를 어른이 돼서까지 흥얼거리고 있는지 이유를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거짓말처럼 알게 되었다. 신호등의 빨간 불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나직이 부르던 노래가 ‘그립습~니다’하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냥 툭! 하고 눈물이 터져버렸다. 눈은 신호등을 보고 있었지만 내 귀는 내 노래를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1절).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 고향/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2절). 복숭아꽃과 살구꽃이 피고 수양버들이 춤추는 건 현재인데,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보면 이미 저 멀리 있어 그저 그립다고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는, 내 무력감을 느껴버린 것이다. 고향의 모습은 형형색색 화려했다. 되돌아갈 수 없는 거리감 때문에 그 행복이 더욱 절실해진 것이다. 그래서 고향의 봄은 그립다, 아 그때가 정말 그립다 하고 울고 있는 것이다. 혹 누가 볼까봐 혼자서 그 노래를 부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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