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런닝구
-배한권
작은누나가 엄마보고
엄마 런닝구 다 떨어졌다
한 개 사라 한다.
엄마는 옷 입으마 안 보인다고
떨어졌는 걸 그대로 입는다.
런닝구 구멍이 콩만하게
뚫려져 있는 줄 알았는데
대지비만하게 뚫려져 있다.
아버지는 그걸 보고
런닝구를 쭉 쭉 쨌다.
엄마는
와 이카노
너무 째마 걸레도 못한다 한다.
엄마는 새 걸로 갈아입고
째진 런닝구를 보시더니
두 번 더 입을 수 있을 낀데 한다.
-어느 가족의 사랑 방식
경상도 말은 왁살스럽고 투박하다. 그래서 마음의 표현방식은 대개가 퉁명스럽거나 그것도 아니면 무지막지한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사랑한다는 말의 전달방식이 서툴다.
엄마의 떨어진 내의가 식구들의 눈에 들어 왔다. 엄마 ‘런닝구’에 난 구멍이 ‘콩’만하던 게 어느 날 ‘대지비’만하게 보였다면 그게 엄마에 대한 사랑이 자랐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는 아예 “런닝구를 쭉 쭉” 째버리는 아버지의 사랑 전달방식에도 녹아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엄마가 새 내의를 사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한결같이 어머니를 깊이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행동에 대해 짐짓 “와 이카노” 라고 성난 듯이 대꾸하고 있지만, 실은 엄마도 그런 가족이 고맙기는 마찬가지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한 개’ ‘런닝구’ ‘콩’ ‘대지비’ ‘째다’ 같은 말들이 뿜어내는 신선함이다. 그걸 표준어로 바꾸면 이 시는 금방 새들새들 시들어버린다. 이들 투박한 말들은 세련된 언어는 갖다 붙이지도 못할 정도로 생활공간의 진실을 실감 있게 실어 나른다.
“너무 째마 걸레도 못한다” “두 번 더 입을 수 있을 낀데” 어려운 시절 흔히 듣고 자란 그 말들 다시 듣고 싶다. 이래저래 눈부신 햇살이 어머니 자애로우신 마음처럼 비춰오는, 어버이날 가까운 오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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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은 시인 약력
경북 안강 출생. 198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5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 저서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외 7권, 1996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경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