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는 몽고병란과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황폐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때 모전석탑도 크게 훼손되었을 것이다. 현재의 탑은 1915년 일본인의 손으로 복원이 된 것이다.
모전석탑의 기단 폭(13.13m)은 1층 탑신 폭(6.55m)의 약 2배로 기단 윗면에는 박석(薄石)이 깔려 있는데 기단 끝에서 탑신을 받치고 있는 지대석 하부에 이르기까지 약 4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한국 고적의 도판을 모은 ‘조선고적도보’에 수리 전과 수리 후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는데 수리 전의 기단은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기단부분의 훼손이 심하여 확실하진 않지만 보수 전에는 층단이 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기단 폭도 지금보다 좁아 보인다. 수리 후의 모습에서도 기단 윗부분에 잔디가 심어져 있어 박석이 깔린 지금과는 다르다
남측 감실 앞 기단 상부에는 대석(1,370 X 880 X 239mm)이 있는데 그 용도를 알 수 없으나 다른 3면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면이 탑의 정면임을 짐작케 한다.
탑신은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전탑 양식을 모방한 석탑으로 현재 3층으로 되어 있다. 1층 탑신은 화강암 장대석을 놓은 1단의 높은 탑신괴임 위에 모전(模傳)으로 36단을 쌓아 올렸다. 옥개는 받침이 7단, 낙수면이 11단이다.
2층 탑신은 7단, 옥개의 받침이 6단, 낙수면은 11단이며, 3층은 탑신이 7단, 옥개가 3단이며 낙수면은 23단으로 방추형으로 되어 있고 그 위로 앙화를 올려놓았다. 앙화의 네 면은 모두 똑같은 문양인데 그 중 남측 면이 가장 명확하게 남아 있다.
1층 탑신 네 면에는 감실이 있다. 감실 상부에 인방석을 설치하고 하부에는 문지방석을 놓고 입구 좌우에는 감실을 수호하는 금강역사상이 조각된 화강석 문주(門柱)를 설치하고 돌로 된 문짝을 달았다. 문짝은 다듬은 판석으로 좌우양단의 상하를 고정시켜 감실 안쪽 좌우로 밀어서 열도록 하였는데 손잡이가 있었던 듯한 흔적인 구멍이 남아있다.
1915년 수리 이전에는 서쪽 감실을 제외한 남·북·동면의 감실은 안산암으로 쌓아올려 입구가 막혀있었으나 복원을 하면서 지금처럼 4곳의 감실을 만들어서 돌문을 여닫을 수 있게 하였다.
문 좌우의 금강역사상은 권법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상의 높이는 약 1.2m이고, 20-25cm 정도 튀어나온 고부조로 섬세하게 조각이 되어 있다.
남쪽 감실 안에만 목이 없는 석조 입불상이 있었는데 얼마 전 목 부분을 복원하였다. 이 석조 입불상은 모전석탑 조성 당시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 탑을 복원한 후 남은 석재를 남동쪽 담장 안에 쌓아두었다가 현재는 동쪽 담장 밖으로 옮겨 천막으로 덮어 두었다.
이 모전석탑이 3층이지만 학계에서는 조성 당시에는 7층 혹은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등 논란이 있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삼성문화재단에서 남아 있는 탑재들의 부피와 탑 외부 면적의 상관관계를 컴퓨터로 분석한 결과 9층이었음이 확인되었다.
퇴임 이후에도 늘 쫓기듯 생활해 왔다.
“가끔 떠나라. 떠나서 잠시 쉬어라. 그래야 다시 돌아와서 일할 때 더 분명한 판단을 내리게 될 것이다. 쉬지 않고 계속 일을 하다보면 판단력을 잃게 되리니 조금 멀리 떠나라. 그러면 하는 일이 좀 작게 보이고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면서 어디에 조화나 균형이 부족한지 더욱 자세하게 보일 것이다.”
인류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한 말이다. 그의 말을 좇아 짐을 꾸려 동유럽을 다녀왔다. 시차 적응 등 여행 후유증은 있으나 머리가 맑아진 느낌이다. 앞으로 문화재를 보는 눈이 더 밝아질 것이란 기대를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