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선종을 중흥시킨 대선사 경허(鏡虛) 스님은 깨달음을 얻은 후 다음과 같은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世與靑山何者是(세여청산하자시) 세속과 청산은 어느 것이 옳으냐? 春光無處不開花(춘광무처불개화) 봄볕 비추는 곳에 꽃 피지 않은 곳이 없구나. 분황사에 이르기까지 온천지가 꽃이다.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고 저절로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스님이 깨달음을 얻을 당시 이렇게 꽃이 만발했던 것은 아닐까… 분황사는 평지형 가람이다. 평지형 가람의 입구는 큰 규모의 사찰인 경우 남문을 통과하여 중문으로 들어서면 경내에 이르게 된다. 황룡사지, 감은사지를 비롯하여 부여 정림사지, 익산 미륵사지 등 규모가 큰 사찰은 발굴 결과 남문과 중문지가 확인되고 있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분황사는 우선 보기에 자그마한 사찰에 불과하다. 그러나 1990년부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분황사 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분황사 석탑에서 남쪽으로 30.65m 떨어진 지점에서 중문터를 확인했다. 특히 남쪽 회랑 전체의 동서 너비는 138.4m로, 이는 176m인 황룡사에 버금가는 거찰(巨刹)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발굴조사에서 석탑 북쪽에 3개의 금당이 ‘품(品)’자형으로 배치된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으로 창건된 가람배치양식을 확인했다. 사찰에 세우는 탑이 중국에서는 벽돌을 구워서 쌓은 전탑(塼塔), 우리나라는 돌로 된 석탑(石塔), 일본은 나무로 만든 목탑(木塔)이 많다. 분황사 석탑은 신라 최초의 석탑으로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이다. 오래전 필자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관광객을 상대로 문화재를 해설하는 사람이 있었다. 두 다리의 균형이 맞지 않아 심하게 절뚝거리는 사람이었는데, 무슨 근거에서였는지 그 분은 이 탑의 석재를 함경도에서 가져왔다고 했다. 먼 바닷길로 석재를 운반하여 이곳까지 오는 동안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에 절여져 지금 석재 표면이 뿌옇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그러려니 생각했지만 사실 이는 소금 성분이 아니고 탑을 보수할 때 사용한 시멘트에서 베어져 나온 것이다. 이 석탑은 634년(선덕여왕3) 분황사의 창건과 동시에 건립되었다고 생각되나 임진왜란 때 반쯤 파괴되었는데, 뒤에 몇 차례 보수되었고, 지금의 탑은 1915년에 수리한 모습이다. 현재는 3층으로 되어있으나 원래는 9층 또는 7층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런데 90년대 삼성문화재단에서 남아있는 탑재들을 종합하여 분석 한 결과 원래는 9층임이 확인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3층의 탑은 높이는 13m이다. 현재 탑의 전체 높이는 9.3m, 1층 탑신 폭이 6.5m이다. 기단은 한 변이 약 13m로 탑신 폭의 약 2배이고, 높이는 약1m인데 크기가 제각기 다른 막돌로 쌓고, 윗면에는 박석(薄石, 얇고 넓적한 돌)이 깔려 있다. 기단 끝에서 탑신을 받치고 있는 지대석 하부에 이르기까지 약 4° 정도 경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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