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아들 녀석은 과자를 좋아합니다. 애들이란 원래 그렇다지만 이 녀석은 정도가 심합니다. 애기 때는 토끼처럼 난 두 이빨로 과자 한 알을 하루 종일 깨작거렸었는데, 지금은 후식으로 과자까지 먹어야 비로소 밥을 먹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거의 매끼마다 적용된다고 보면 맞습니다. 처음에는 신기해서 그저 지켜보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이게 아니다 싶습니다. 선반 높이 두어도 결국 알아내고 애 엄마가 숨겨 놓아도 귀신처럼 찾아냅니다. ‘내가 못 찾을 줄 알았지?’ 하고는 용케 찾은 그 자리에 빈 과자 껍질만 잔뜩 남겨놓는 식입니다.
“너 이제부터 과자는 절대 금지야!” 결국 어리석은(?) 부모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첫 날은 그나마 잘 버텼습니다. 이틀째 되던 날 아들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매사에 짜증을 부리고 밥도 잘 안 먹더라고요. 아예 뒹굴며 온몸으로 시위도 합니다. 과자 한 봉지가 이렇게 대단했나? 새삼 놀랍습니다. 생전 안 먹던 누룽지를 입에 털어 넣더라고요. 나중에 알게 됐지만 과자처럼 바스락거리는 소리 때문이라나요. 아무런 맛이 없으니 바로 뱉어버리고는 또 짜증을 부립니다. 아들도, 그걸 지켜보던 엄마 아빠도 인내심이 바닥에 이르렀을 즈음, “그래, 먹어라 먹어. 그 대신 일요일 만이다!” 하고 극적인 타협에 이릅니다.
파티는 정말 화끈하게 진행되었죠. 손가락만한 과자는 냉면대접 정도 크기 그릇에, 양도 많고 덩치도 큰 놈들은 아예 쟁반 째로 제공되었습니다. 매일 조금씩 먹는 것보다 양도 훨씬 많았습니다. 며칠이었지만 겪어내야 했던 그 고통이 트라우마(trauma)로 남지 않기를 바라는,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금단 현상에 시달리던 녀석을 일단은 살리고 봐야겠다 싶어 시작한 ‘일요일 과자파티’는, 그러나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말았습니다. 엄마 아빠는 보고 말았지요. 손가락도 아닌 주먹 째로 과자를 우물대고, 부라린 눈으로는 연신 과자더미를 훑는 작은 하이에나를요….
그 과정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손으로 과자를 흘리지 않고 능숙하게 입으로 가져오면, 입으로는 마치 기계처럼 씹어대며, 동시에 눈으로는 그 다음 먹을 과자를 스캐닝 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진행되더군요. 그것도 무한 반복되니 가히 알파고 수준의 멀티태스킹(multi-tasking)이라고 할 수 있겠더군요.
입보다는 손, 손보다는 눈이 더 게걸스러운 모양입니다. 고급 식당의 경쾌한 템포의 노래, 번쩍대는 포크와 나이프, 화려한 접시들은 눈을 자극하기 위한 고도의 심리장치라고 합니다. 욕망은 배고픔으로 시작되고 손과 눈으로 극대화 됩니다. 인류의 전 진화 과정이 그걸 증명합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실연당한 주인공이 달고 쓴 초콜릿을 집어드는 걸 자주 봅니다. 그 헛헛한 마음을 채우는 데 살찌기 딱 좋은 초콜릿보다 더한 유혹은 없으니까요.
지금도 아들 녀석은 길에 혹 과자가 떨어져 있으면 얼른 입에 집어넣고 봅니다. 거의 무조건적입니다. 그리고는 그 행동이 사회적으로, 아니 적어도 엄마 아빠한테 어떤 의미인지 환기하고는 뱉습니다. 아마 당분간은 지속될 명현 반응이라고 저희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욕망은 마치 고무풍선처럼 여기를 누르면 저기가 튀어나온다는 걸 또 한 번 배웁니다. 하나뿐인 아들 녀석을 욕망의 풍선으로 만들어가며 배운 지혜라 더욱 쓰지만 달달합니다. 불교경전에서 욕망을 없애라고 했지, 욕망하는 나를 없애라고 한 적은 없다는 걸 떠올려 봅니다.
아들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게걸스런 탐욕은 제거할 수 없다고, 어르고 달래며 그 실체를 알아갈 뿐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