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자왈 교언영색이 선의인이니라. <주석> 巧言令色 : 포함(包咸)이 말하기를 교언은 말을 좋아함이요, 영색은 그 낯빛을 잘 함이라 하였다. <해석>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기뻐하는 말을 하고 남이 기뻐하는 낯빛을 짓는 사람은 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드물다. <黙想> “巧言”이란 말 그대로 교묘한 말이라고 하겠다. 쉽게 말하면 말을 아주 잘하여 남의 비위를 잘 맞추는 말, 곧 아첨하는 말이라고 할 것이다. “令色” 또한 낯빛을 잘하여 남에게 잘 보이려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사극(史劇)에 흔히 나오는 간신의 말과 그 낯빛이 전형적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인지가 발달하여 남들이 당장 알 수 있게 그런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고 도리어 충언인 양 직언인 양 하므로 상대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낯빛 또한 워낙 점잔을 가장하므로 영색임을 모르게 한다. 문제는 그 마음가짐이다. 상대에게 아부하여 무언가를 얻으려고 한다면 그 말이 겉으로는 교언이 아니라도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교언이요, 낯빛 또한 이와 같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러기에 옛사람들은 흔히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고 하였다. 또 어떤 분은 재미있는 말을 하셨다. “도둑놈이 꼭 사람 같이 생겨서 알기 어렵다” 그러기에 세상 살아가며 이런 교언영색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기를 당하는가? 나는 평소 직언은 절대로 결과적으로도 교언이 안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이 직언으로 내 마음을 얻어서는 교언 영색하는 정도 이상의 사기를 치는 것이다. 그래 하도 억울하여 이런 시를 읊은 적이 있다. 위선자 양의 탈을 쓴 여우 너를 잘못 본 내 눈을 저주한다. 그래도 용서하고 섬겨야 한다는 말씀 앞에 나는 미친다. 미워하면서 사랑하려는 내가 정녕 위선자 네가 나를 바로 보았던가? 차라리 위선에 뻔뻔한 네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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