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하나 풀어봅시다. 환자 중에 가장 고치기 힘든 환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귀가 좀 어두우시고 고집이 센 할아버지 환자일까요, 아니면 보험사기에 가담한 나이* 환자일까요? 빨리 말씀 드릴게요. 답은, 의사보다 자기 병을 더 잘 아는 환자랍니다. 왠지 전문의(專門醫)라고 하면 환자 입장에서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내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은 의사선생님의 권위와 능력을 더욱 높일 테니까요. 심각한 병일수록 더욱 그렇겠죠. 그런 의사선생님보다 병을 더 잘 아는 환자라면 제때 약을 복용하라는 지시나 힘든 재활치료를 그저 고분고분 따라할까요? “내가 내 병 속성을 다 알아, 이 정도는 괜찮아, 문제없어, 걱정 안 해도 돼~”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절대 병이 잘 낫지 않습니다. 그럼, 심화문제를 풀어볼까요? 부처님이 가장 구제하기 힘든 중생이 있다면, 그는 과연 누구일까요? 큰스님들이 대장경을 조목조목 짚어 가며 설득하고 또 구슬려도 결코 제도가 안 되는 그런 중생 말입니다. 답은 바로 이 세상이 너무 만족스러운 사람일 겁니다. 한결같지 않는 현실이 전혀 고통스럽지 않는 사람입니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학점이 터무니없어도 마냥 즐겁고, 와이프가 바람이 나도 그냥 신나고, 목과 눈 주위에 주름이 하나 둘 늘어난다고 행복해하는 사람 말입니다. 고통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과 그것이 고통인지 모르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거든요. 고백하자면, 부끄럽게도 저는 후자 쪽입니다. 그 시작은 국민학교(초등학교)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벼락치기로 첫 시험을 망친 저는 그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그런데 다음, 또 그 다음 시험도 계속 벼락치기를 했던 겁니다. 그 과정이 너무나 괴롭고 조마조마했는데도 말입니다. 그 고통은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더욱 강해졌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괴로움을 대학교 때까지 반복적으로 경험했습니다. 평소에 예습이나 복습같이 준비만 잘 했더라도 절대 겪지 않았을 그런 고통을 말입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 경험을 그것도 너무 오랫동안 말이죠.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이라는 학자가 개를 가지고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A그룹의 개들은 전기 충격을 받지만 스스로 버튼을 누르면 전기 충격은 꺼지게끔 했고요, B그룹은 버튼이 아예 없어서 어떻게 하든 개들은 전기 충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했답니다. 잔인한 실험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개들이 그 실험 환경에 익숙할 즈음, 이번에는 우리의 문을 열어놓은 채 다시 한 번 전기 충격을 주었습니다. 실험용 개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고통을 ‘선택’해 본 경험이 있었던 A그룹은 모두 탈출했지만, 고통에 ‘길들여진’ B그룹의 개들은 도망갈 수 있었는데도 그저 전기 충격을 묵묵히 견디고 있더랍니다. 바보처럼 말입니다. 시험 때문에 고생했던 저의 경험을 마틴 교수는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고 요약합니다. 시험 때만 되면 이유 없이 배나 머리가 아팠고 불편한 마음에 학교 가기가 정말 싫었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덧 시험은 끝이 나고 다음 시험까지 여유도 생기게 된 것입니다. 무기력에 길들여지기 딱 좋은 상황이었던 거죠. 그러니 그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생각은 전혀 못 하는 거지요, 아니 안 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무기력이 학습의 결과라는 것을 고려의 지눌스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의 고통이 마치 불타는 집과 같은데, 왜 그 속에서 사서 고통을 받고들 있습니까? - (수심결(修心訣))” 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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