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리와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벚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면서 4월에 접어들었다. 4월을 뜻하는 ‘April’은 ‘열리다. 개화하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aperire’에서 온 말이라고도 하고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Apphrodite)의 달’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또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이 4월을 ‘생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달’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현재 나라 형편은 온 나라 사람들이 기쁨은커녕 수심이 가득하다. 4월 새날을 맞아 온 나라에 끼어 있는 먹구름을 말짱히 걷어내고 새 세상을 열어 아름다운 마음으로 아프로디테를 맞이했으면 좋겠다. 도량석(道場釋)은 사찰에서 하루 일과 중 최초 의식으로 보통 사찰의 경내를 돌며 천수경(千手經)에 나오는 긴 주문인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염하기도 하고, 『금강경』 구절이나 조사(祖師)들의 게송을 외우기도 한다. 이는 도량을 깨끗하게 하고, 잠들어 있는 천지만물을 깨우며 일체 중생들이 미혹에서 깨어나게 한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또 맺힌 것을 푼다는 의미도 갖는다. 이 때 목탁소리는 약한 음에서 서서히 높은 음으로 올렸다가 내리기를 반복하는데 이는 일체 중생이 놀라지 않고 천천히 깨어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의식은 사찰 내에서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옛 분황사 스님은 절 부근의 민가 골목을 두루 다니면서 이와 같은 의식을 했었다. 필자는 어린 시절 가끔 잠에서 깨어 분황사 스님의 목탁과 함께 들리는 독경소리를 듣곤 했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분황사는 634년(선덕여왕 3) 정월에 창건된 사찰로 전불칠처가람 터에 지어진 일곱 사찰 중 오늘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유일한 사찰이다. ‘분황(芬皇)’은 분타리(芬陀利)와 각황(覺皇)의 합성어로 세상의 괴로움과 번뇌에 물들지 않은 깨달음을 얻은 부처를 의미한다. 분타리는 백련화(白蓮花)로 그 꽃은 눈과 같이 희고 은빛 같아서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며, 인간세계에는 없고 깨달은 세계에만 존재한다. 또 다른 의미로 연꽃이 활짝 피어 가장 아름다울 때의 모양을 분타리라고도 한다. 또, ‘분황(芬皇)’은 ‘芬(향기로울 분)’ ‘皇(임금 황)’으로 ‘향기가 나는 임금’ 즉 창건 당시의 임금이신 선덕여왕을 지칭한다는 주장도 있다. 분황사(芬皇寺)는 황룡사 북쪽에 인접한 아담한 절로서 경주시가지 동쪽, 보문광관단지 가는 길과 경포산업우회도로가 교차하는 네거리 바로 남서쪽 느티나무 숲속에 포근하게 안기어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분황사의 상징인 모전석탑을 중심으로 남서쪽에 당간지주가 있고, 탑 북쪽에는 근래에 세운 보광전(普光殿)이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755년(경덕왕 14)에 강고내말(强古乃末)이 구리 30만 6700근을 들여 약사여래상을 만들어 안치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현재 보광전에 있는 약사여래상은 당시의 그 불상이 아니다. 또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도가 있었다는데 이는 당시 좌전(左殿)의 천수대비 벽화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영험이 있어서 경덕왕 때 희명(希明)이라는 어린아이의 눈을 뜨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모전석탑과 보광전 사이에는 석정(石井)이 있고, 그 동편에는 화쟁국사 비부가 있다. 원효가 죽은 뒤 아들인 설총이 원효의 유해(遺骸)로 소상(塑像)을 만들어서 이 절에 안치하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다하였는데 언젠가 설총이 옆에서 절을 하자 소상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 원효의 소상이 고개를 돌린 채로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이 상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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