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학이(學而)편의 첫 장 말씀이다. 끝으로 ‘人不知而 不慍이면 不亦君子乎아?’를 묵상하여 보자. 나는 이 글을 처음 보고는 “군자가 되는 게 뭐 그리 크게 어려운 것도 아니구나” 라고 생각하였다.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이지 그게 뭐 그렇게 성까지 낼 일은 아닌 것 같았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 성낸다는 말은 섭섭해 하는 감정 정도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래도 그 정도가 군자라면 많은 분이 군자가 될 것이고 나마저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사람들 거의 모두가 소인이요, 물론 나도 소인이었다. 하기야 자기를 알아달라는 이 ‘인정(認定)에의 욕구’도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라 그렇게 탓할 것이 아니라고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본적인 욕구도 식욕이나 성욕처럼 자제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자제의 능력에 따라 소인과 군자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스스로를 자제하여 이 욕구에서만은 초월하는 경지, 즉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거나 섭섭해 하지 않는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군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내가 군자라고 자처하지는 않는다. 어림없는 일이다. 다만 가까워지고자 나름으로는 조금의 노력을 하였다. 그래 이제 고희까지 지났으니 어느 정도 그 ‘인정에의 욕구’에서만은 조금 초월하였으리라 여겼는데 이제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른 사람, 특히 욕구가 왕성한 젊은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내 눈의 들보는 못 보고 남의 눈에 있는 티만 보았던 것이다. 나는 이런 나를 고발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얼마 전 일요일이다. 대학 교직원 상대의 강의를 하게 되었다. 3년만이다. 그래 나름으로 명상하며 영감을 얻어 주제를 정하고 내용은 내가 겪은 일을 중심으로 구성하여 딴에는 꽤 호소력 있게 준비하여 강의하였더니 더러 잘하였다고 칭찬을 해주고 심지어 점심까지 대접하는 고마운 분도 계셨다. 하여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하였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그럴 수 있다고 보아 넘길 수도 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만나서도 그 강의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그만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 순간, 나는 내가 얼마나 소인인가를 절감하였다. 그까짓 정도 가지고 알아달라고 빌붙는 자신, 모른 척 한다고 섭섭해 하는 자신. 이 자신을 보며 나는 그만 경악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참으로 소인이로구나” “진실로 한심하구나” 나아가 추잡하다고까지 여겨져 자신이 더없이 혐오스러웠다. 나는 내가 이렇게도 ‘인정에의 욕구’가 강한 사람인 줄 일찍이 느껴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정말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공자님이 바로 보신 것이다. 오늘도 나는 결코 군자가 못 되는 자신을 보며 서글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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