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저서에서 자주 제일 앞 구의 한 두 자를 취하여 표제를 삼았다. 별다른 뜻은 없다. 시경, 논어, 맹자 다 이렇다. 본 편의 첫 구는 ‘子曰 學而時習之’로 되어 있어 학이 두 자를 취하여 본편의 편명으로 삼았다. 아래 각 편도 다 같다.
1.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자왈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유붕이 자원방래면 불역낙호아? 인부지이불온이면 불역군자호아?
<註釋> 子 : 제자가 스승을 칭하여 子라고 한다. 논어에서 ‘子曰’ 이라고 하는 것은 다 공자님을 가리킨다.
說 : 열(悅)과 같다. 마음이 기쁜 것이다. 필자 주 : 읽기도 ‘열’로 읽는다.
朋 : 뜻이 같고 도(道)가 합치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포함(包咸)이 말하기를 ‘동문(同門)’을 붕(朋)이라 하였다.
慍 : 원한이다.
君子 ; 도덕을 갖추고 수양된 사람을 가리킨다. 주희(朱熹)가 말하기를 ‘덕을 이룬 이름’이라 하였다.
<解釋>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이미 학문을 얻고서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도를 같이하는 벗이 먼 곳으로부터 오면 매우 즐겁지 않겠는가? 남들이 나의 재주와 학문을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덕을 이룬 군자가 아니겠는가?
<黙想> 논어의 첫 편 첫 장의 말로서 아주 긴요한 진리의 말씀인 것 같다. 그런데 이에 앞서 ‘學而 第一’ 이라는 말부터 잠깐 보자. 이는 우리 식으로 하면 거꾸로 ‘第一 學而’가 되어야 할 것인데 중국식은 ‘第一, 第二’ 하는 그 순서보다 그 이름을 먼저 내세우는 것이다. 그래 ‘學而 第一’인 것이다. 문화적인 차이라고 할까?
그럼 본문으로 들어가서 먼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를 살펴보자. 솔직히 나는 이 경지에는 어림이 없다. 먼저 크게 배운 것도 없지만 더구나 그것을 익히면 기쁜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못 낸다. 간혹 어려운 문제를 풀고 나면 기쁜 때가 혹 있긴 하지만 아주 드문 일이다. 그 밖엔 그저 귀찮을 뿐인 것이다. 그러면서 학문을 한답시고 학자연하였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다음 “유붕이 자원방래면 불역낙호아?” 를 보자. 이 제목으로 글을 한 편 쓴 것이 있다. 미국에 있는 신수영 교수의 이야기를 한 것인데 이미 발표하였으므로 생략하고 이번에 겪은 이야기를 할까 한다.
이번에 동맥경화로 산에서 쓰러졌다가 끝내는 한국에 나가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피붙이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두 친구가 왔다. 한 분은 충북 음성에서 왔고 한분은 경북 포항에서 왔다. 둘 다 2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이다. 별 일도 아닌데 온다기에 이제 몸이 괜찮으니 제발 오지 말라고 사정 했다.
그런데 이 친구 왈 “가고 안 가고는 우리 자유이고 만나고 안 만나고는 자네 자유다. 우리는 가니 그리 알고 만나주든지 안 만나주든지 마음대로 하라” 이에 내가 질 수밖에 없었다.
서로 찾기도 번거로워 이번에도 그만 대구역 식당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만나서 점심 한 그릇 간단히 먹고는 헤어지는 것이다. 그 한 시간의 만남을 위하여 그 먼 길을 오는 것이다. 이런 만남이 벌써 몇 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
그들은 1년에 한 번 귀국하는 내 얼굴을 보기 위하여 해마다 그렇게 와서 만나고는 그렇게 덤덤히 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미안하여 죽을 지경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 우정이 눈물 나게 고마워 늘 감동을 하는데 이번 역시 그런 것이다. 비록 미안하여 오지 말라고 하긴 하였으나 얼마나 그 정이 고마우랴. 그래 속으로는 오히려 더 만나고 싶었으리라. 이야말로 ‘不亦說乎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