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울산 간 산업도로는 평소 대형 화물차가 연이어 과속으로 달리고 있어 보행이 불안하다. 길가에 주차하기가 곤란하여 멀찍이 황룡사지 서편에 주차를 하고 한참을 걸어서 현장에 도착했다. 낭산 북서쪽에 있는 최치원 선생의 생가로 짐작되는 독서당 입구 표지판에서 도로 비껴 북편으로 난 농수로 옆 농로를 따라 100여m 떨어진 논 한가운데에 방형의 토단이 있다. ‘구황동 목탑지’로 알려진 곳이다. 주위를 살피면서 사진을 찍는데 필자의 나이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 부근 논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야, 야!” 고함을 지르면서 다가온다. 곧 대들듯한 자세이다. 은근히 걱정이 되지만 하던 일을 계속했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멋쩍은 듯 그냥 돌아간다. 대꾸를 하지 않은 것이 참 잘한 것 같다. 그래서 ‘심심창해수(心深滄海水) 구중곤륜산(口重崑崙山)’이라고 했던가? “마음 씀씀이는 창해의 물과 같이 깊어야 하고 입은 곤륜산처럼 무거워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목탑지는 동서 12.5m, 남북 13.0m, 높이 0.8∼1.2m로 방형에 가까운 토단(土壇)으로 현재 논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토단의 중앙부에는 심초석으로 추정되는 팔각형의 석재가 있는데 중앙부에는 사리공으로 추정되는 방형의 홈이 2단으로 만들어져 있다. 1965년 신라문화동인회원에 의해 발견될 당시에는 민묘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이장이 된 듯 탑지만 남아 있다. 석등대석으로 보이는 석재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재에는 이 심초석으로 추정되는 석재 외에 토단 아래로 초석으로 보이는 방형의 석재가 있고 주위에 와편이 다수 흩어져 있으나 그 외 사찰과 관련한 흔적은 눈에 띄지 않는다. 영국의 소설가 사무엘 바틀러가 이런 말을 남겼다. “눈을 감아라, 그러면 너는 볼 것이다.” 흔적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그냥 눈을 감으니 어렴풋이 사찰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부근에는 황룡사를 비롯하여 사천왕사지 및 망덕사지에 목탑의 심초석이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황룡사는 단탑인데 비해 사천왕사와 망덕사는 쌍탑이다. 이곳 구황동 목탑은 단탑으로 심초석의 규모로 보아 소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가스관 매몰을 위한 왕경지구 내 지표를 조사한 결과 건물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길이 약110m, 너비 1.5∼1.6m의 담장 기초 석열이 드러나서 신라왕경 안에 구획된 택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이 목탑지에서 서쪽으로 40∼50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서 다수의 ‘万正寺之’명 연화문수막새를 발굴하였다. 지표의 30∼75㎝ 아래 지점에서 발견하였는데 파편까지 포함하여 모두 7점이 확인되었다 이 명문와는 연화문수막새로 문양면의 중앙에는 돌출된 자방(子房)이 표현되어 있고 그 안에는 가운데로부터 1, 4, 8개의 연자(蓮子)를 배치하고, 둘레 주연부에는 작은 연주문을 둘렀다. 바깥쪽에는 1조의 돌대가 돌려져 있으며 크기는 지름 15.2㎝, 두께 2.6㎝, 주연 너비 1.7㎝, 주연 높이 0.8㎝이다. 연꽃잎은 끝부분이 둥글게 표현된 4쌍의 짝잎으로 十자 상의 등간격으로 배치한 후, 꽃잎의 사이에는 글자를 배치하였는데 시계방향으로 읽으면 ‘万正寺之’로 ‘만정사’에 사용된 기와로 추정된다. 그러나 오른쪽으로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읽어 ‘正万之寺’로 볼 수도 있다. ‘정만지사’라면 정만이라는 인물의 절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폐사지에 기와편이 여럿 발굴이 되었지만 이렇게 ‘之’자가 들어간 경우는 없었다. 이 사찰과 관련한 기록을 전하는 문헌이 전혀 없으나 명문 수막새가 발굴됨으로 명확하지는 않으나 대강의 사찰 이름을 추정해 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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