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박남철
고등학교 다닐 때
버스 안에서 늘 새침하던
어떻게든 사귀고 싶었던
포항여고 그 계집애
어느 날 누이동생이
그저 철없는 표정으로
내 일기장 속에서도 늘 새침하던
계집애의 심각한 편지를
가져 왔다
그날 밤 달은 뜨고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엔 정말 계집애가
교복 차림으로 검은 운동화로
작은 그림자를 밟고 여우처럼
꿈처럼 서 있었다 나를
허연 달빛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얻어맞았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에서 정말 계집애는
죽도록 얻어맞았다 처음엔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나중엔
눈물도 안 흘리고 왜
때리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달빛 아래서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날 밤 달은 지고
그 또 다른 허연 분노가
면도칼로 책상 모서리를
나를 함부로 깎으면서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자꾸 책상 모서리를
눈물을 흘리며 책상 모서리를
깎아댔다
-성장에 이르게 하는 ‘허연’ 분노
매일 아침 같은 버스에 타고 등교를 하던 새침한 표정의 여고생이 있었다. 그녀는 함께 버스를 탔던 소년의 일기에 날마다 쌀쌀하고 도도한 모습으로 묘사될 정도로 소년의 베아트리체가 돼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의 여동생을 통해 만나자는 ‘심각한’ 편지를 보내왔다. 교복과 검은 운동화 차림의 소녀는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에 중천에 뜬 달 아래 짧은 그림자를 밟고 ‘여우처럼’ 서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선망하던 그녀와 단둘이 만나는 건 소년의 오랜 꿈이었다. 그러나 소년의 마음엔 그녀가 먼저 그런 데이트 신청을 하는 범속한 인물이어서는 안 된다. 소년의 ‘허연’ 분노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왜 때리느냐고 묻지도 않는” 그녀에게 느닷없는 폭력을 휘두르고 만다. 이 폭력은 소녀의 ‘천사’에서 ‘속물’로의 변신이 불러일으킨 사건이다. 마음 속 천사의 상실을 그렇게라도 보상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만 끝난다면 이 폭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지 모른다. 그날 밤 그 ‘허연’ 분노는 소년 자신에게로 되돌려진다. “나는 왜” 그렇게 옹졸할 수밖에 없었던가? “면도칼로 책상 모서리를” 아니 ‘나’를 깎아댄다. 소녀가 흘리지 않았던 “눈물까지 흘리며”. 그 ‘허연 분노’가 자신에게 이르게 되면서 우리 모두는 성장을 해가게 된다.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그랬던 것처럼. 소년은 그날 이후 분노를 안으로 다지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갔을 것이다. 누구나 다 첫사랑의 경험을 가지고 있겠지만, 항용 떠올리는 경험과는 다른 첫사랑의 사건을 통해 우리는 첫사랑의 외연을 좀 더 확장할 수 있었다. 모든 문학은 새로운 것일수록 더 큰 인지적, 정서적 충격을 가한다. 이 시가 그렇다. 우리는 한편의 울림 있는 성장담을 읽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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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은 시인 약력
경북 안강 출생. 198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5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 저서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외 7권, 1996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경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