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였다. 집 근처에 박물관이 새로 생겼다 길래 아들 녀석이랑 둘이서 구경을 갔다. 예상대로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아빠, 저 아줌마 찌찌 좀 봐, 엄마 꺼보다 더 크다 그치?”
제발 모르는 아이이길 바랬건만 히히거리며 내 손에 매달리는 걸 보니 우리 아들 맞다. 이 녀석은 꼭 사람이 많은 곳을 골라가며 아빠를 무안하게 한다. 녀석의 짓궂은 특기다.
작품에 빠져있던 몇몇 사람들은 녀석의 난데없는 감상평에 아무 반응이 없다. 반면에 박물관에 왔으니 품격 있게 행동하자고 다짐하지만 하는 행동마다 왠지 어설픈, 아빠 같은 사람들만 그 소리에 킬킬댄다. 아마 ‘나도 그런 생각했었는데’ 하는 동질감에서 오는 반응들이 아니었을까?
아들 녀석의 예술 감상법은 특이했다. 일단 작품과 작품 사이를 마구 뛰어다닌다. 박물관은 처음이라 그랬다지만 그래도 예의를 지키라고 단단히 주의를 준다. 녀석은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다가가 슬쩍 보다가 마구 주머니를 뒤진다. 지켜보면 감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행동들이다. 그저 가지고 온 장난감이 잘 있는지 확인했을 뿐이다. 이 녀석에게 있어 예술의 세계는 현실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모양이다. 이내 코를 판다거나 흥얼대며 딴 짓이다.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가 ‘나는 라파엘로처럼 그리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아이들처럼 그림을 그리는 데는 한 평생이 걸렸다’고 고백했다.
피카소가 말한 아이들 속에 이 녀석도 포함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을 보면 작품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데 많은 시간과 집중력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나름 작품 감상으로 바쁜(?) 아들을 세워 놓고 물어 봤다.
“아들, 액자도 작품일까?”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눈빛으로 아빠를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하던 작업을 계속한다.
“우리가 보는 건 액자 속 작품이지 액자는 아니지 않냐?” 하니 대꾸도 없다.
그러고 보니 액자 때문에 작품이 더 폼 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다이아몬드 반지를 고급 케이스에 보관하지 신문지에 둘둘 말아 보관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줏대 없이
“아빠가 그린 그림도 여기 멋진 액자에 넣어 두면 작품 소리 듣겠다. 그치?“ 하니 아들이 입을 연다.
”아빠, 액자만 있다고 다 유명한 건 아니에요, 아까 봤는데 액자가 없는 것도 있어요.“ 아들의 단호한 말에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액자가 작품을 보호하는 용도인지 액자까지 포함해서 작품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예술’과 ‘현실’을 구분하는 지점에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쩌면 작품 속 세상과 ‘세금 고지서’가 중요한 현실 세계, 그 균형을 잡기 위해서라도 액자는 필요할 것 같다.
아들 눈에는 그 아무리 대단한 보티첼리라도 비너스는 그냥 아줌마일 뿐이다. 그 이유로 엄마보다 쪼금(?) 더 큰 찌찌면 충분하다. 예술이냐, 외설이냐? 하는 식의 물음도 액자까지 포함한 건지 아니면 액자는 빼고인지 생각해 보면 된다. 어느 특정 신체 부위만을 감상의 대상으로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액자로 보호하고자 하는 그 전체가 예술의 범위라면, 액자는 작지만 아주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팔정도(八正道), 그 중에 정견(正見)이라고 있다. 사물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정견이다. 그걸 예술적으로 표현해 낸 것이 액자가 아닐까 싶다. 정견은 ‘엄마 찌찌’와 ‘비너스의 가슴’을 선명하게 구별하니까 말이다. 현실과 예술, 낙서와 작품 등 이분법으로 나누어 좋고 나쁨을 따지는 게 그 본질은 아니다. 관람자 스스로 바르게 보는 법을 소리 없이 가르치는 액자가 그런 측면에서 예술이란 생각이 든다. 대통령의 합성 누드화가 논란이 된 요즘, 문득 떠오른 액자에 관한 추억 한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