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에 일본인 학자들이 황룡사 가람배치에 대한 조사내용은 회랑의 형태가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은 장방형으로 모두 서로 연결되도록 되어 있고, 그 내부에 탑과 금당이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본격적인 발굴조사 결과 장방형이 아닌 정방형에 가까운 회랑 내부에 금당 셋과 종루와 경루가 있어 일본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신라의 독특한 가람 배치임이 밝혀졌다.
이밖에도 발굴조사 결과 이 절이 그 규모에 있어서 동양최대의 사찰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특히 구층탑은 무려 80m나 되는 높이를 가진 대탑으로 동양 최고의 목조건물이 황룡사내에 존재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이때 출토된 유물은 무려 4만여 점에 달하며, 이 중 각 시대에 걸쳐 만들어져 사용된 와전류 가운데 특히 측면에 용을 새긴 보상화문전은 지금까지 출토된 예가 없는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금속류로서는 금동제불상, 풍탁, 금동제귀걸이, 청동거울 등이 수습되었으며, 이 중 금동여래입상 1점은 높이 10cm에 지나지 않으나 그 조각기술이 뛰어나고 도금이 매우 찬란하며 형태가 화려하여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할만한 조각품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목탑지의 심초석 아래에서 수습된 작은 백자항아리는 당나라의 작품으로 밝혀져 당시 문물교류의 증거 자료가 되고 있다. 이밖에 높이 182cm, 최대 너비 105cm나 되는 대형의 치미는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아직까지 이만한 크기가 발견된 예가 없는 동양최대의 치미이다. 아울러 이러한 치미가 사용된 건물의 웅장함을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이외에도 황룡사지 발굴은 한 유구를 연중무휴로 8년 동안 발굴 조사한 기록을 세웠다. 지금은 익산 미륵사지 발굴이 15년째 계속되어 이 기록은 깨어졌다. 황룡사지 건물지에 대한 발굴 조사는 이후 다른 건물지 발굴의 표본이 되었다.
발굴조사 성과와 문헌자료를 검토해 본 결과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호국불교의 본산이었음과 현세적 국가수호와 왕권신장의 대표적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위치 또한 신라왕경을 둘러싸고 있는 동쪽의 명활산, 서의 선도산, 남의 남산, 북의 금강산 정상을 동서남북으로 연결하는 교차점에 놓여 왕경의 중심이 되는 사찰이었다.
화담 서경덕이 길을 가다가 울고 있는 젊은이를 만났다.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제가 다섯 살에 눈이 멀어 스무 해가 지났습니다. 아침에 나와 길을 가는데 갑자기 눈이 떠지고 천지만물이 보여 기뻤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려니 갈림길도 많고 비슷비슷한 집들도 많아서 찾아갈 수가 없습니다.”
“도로 눈을 감아라. 네 집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황룡사지를 자주 찾으면서 문화재를 나름대로 좀 안다고 생각했던 것은 오만이었다. 도로 눈을 감아야 제대로 보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