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행, 터널, 판도라. 작년에 개봉하여 화제를 모은 재난영화 리스트다. 지난 3년 동안 세월호, 메르스, 9.12지진이 잇달아 훑고 지나간 사이에 ‘재난’은 충무로의 메인 테마가 되어버린 것이다. 영화는 의도대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더불어 재난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설마?’ 했던 재난이 실제로 엄습했을 때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었던가. 믿었던 국가가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배가 가라앉고,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땅이 요동치는 긴박한 상황에서 국가는 무능했다. 이제 믿을 건 ‘나’ 자신뿐이다. 각자 알아서 살 길을 찾아야 한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신념이 사람들 마음속에 자연스레 자리 잡았다.
9.12지진 후 인터넷 오픈마켓에서는 20만원이 넘는 고가의 생존배낭이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또한 재난 관련 도서의 판매량은 평소보다 10배 정도 폭증했다고 한다. 1분에 20개 이상의 지진발생 제보 글이 뜨면 자동으로 작동하는 ‘지진희 알림’ 앱은 국가재난문자보다 빠르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각자도생의 결과다.
재난이 현실이 되어버린 요즘에 각자도생의 방식은 재난에 대한 적극적인 준비와 대응으로 초기 피해를 줄이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하지만 이 방식은 국가의 재난대응능력에 대한 불신을 넘어서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불신사회 조장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공동체의 유대감은 상실되고 개인은 이기적인 사람으로 변모한다. 이것은 재난만큼이나 큰 위기다.
지금 경주예술의전당 알천미술관 대전시실에서는 ‘재난에 대처하는 법, 준비족 연대기’라는 전시가 한창 열리고 있다. 준비족(preppers)은 미국의 TV시리즈물 ‘둠스데이 프레퍼스(doomsday preppers)’의 인기로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이다. 우리나라에도 재난에 대비한 생존 아이디어를 인터넷 카페에서 서로 공유하고 있는 준비족들이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알천미술관 전시에서도 준비족들의 생존비법은 필수 메뉴다. 각자도생에 충실한 ‘나’를 위한 정보들이 그림처럼 걸려있다. 하지만 전시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외연을 확장하여 ‘우리’들의 환경문제를 다룬다. 가뭄에 강한 올리브 나무를 재배하러 지중해의 작은 섬에 온 네덜란드의 토양복원전문가, 한국에서 잘 나가던 공기업을 그만두고 수도권에서 도시양봉을 시작한 꿀벌학교장, 태양광 연구보다 환경파괴 방지가 더 시급해 보여 환경운동에 투신한 젊은 과학자는 모두 준비족이지만 각자도생과는 거리가 멀다.
필자가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감동을 받은 작품은 서원태 작가님의 ‘human trees’(2016)이다. 이 작품은 미래숲이라는 NGO단체가 중국의 쿠부치 사막에 천만그루의 나무를 심는 모습을 드론(drone)으로 촬영한 것이다. 나무를 심는 이유는 한반도의 황사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드론이 광활한 사막 전경에서 나무 심는 사람들 위로 줌-인(zoom in)할 때, 관람객들은 벅찬 감동을 받게 된다. 사막 위에 심은 나무는 작품 제목처럼 인류를 위한 나무임에 분명하다.
이번 전시는 재난에 대한 각자도생의 방식이 초래할 수 있는 공동체 해체와 이기적 편협주의를 탈피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대형재난이 일어나면 이젠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각자도생도 좋지만 미연에 방지하려는 공동의 노력이 더 중요하다. 우리는 영화 판도라에서 재혁(김남길扮)의 희생이 연대감을 상실한 이기주의에서 온 재앙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