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예의 -문성해 새벽에 깨어 찐 고구마를 먹으며 생각한다 이 빨갛고 뾰족한 끝이 먼 어둠을 뚫고 횡단한 드릴이었다고 그 끝에 그만이 켤 수 있는 오 촉의 등이 있다고 이 팍팍하고 하얀 살이 검은 흙을 밀어내며 일군 누군가의 평생 살림이었다고 이것을 캐낸 자리의 깊은 우묵함과 뻥 뚫린 가슴과 술렁거리며 그 자리로 흘러내릴 흙들도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 대책 없이 땅만 파내려 가던 붉은 옹고집을 단숨에 불과 열로 익혀내는 건 어쩐지 좀 너무하다고 그래서 이것은 가슴을 퍽퍽 치고 먹어야 하는 게 조그만 예의라고 -겨울밤, 고구마를 먹으면서 떠올리는 생명에 대한 예의 땅 밖에 있는 잎사귀, 줄기들과 연락하며 조금씩 아래로 아래로 밀어갔을 땅속 ‘그 붉고 어린 뿌리’의 성장을 생각한다. 칸데라 불빛을 이마에 두른 ‘어린 용사’는 힘이 빠지면 오오래 고민하며 숨을 모으고 자신의 의지를 틔우고, 다시 칠흑의 어둠을 뚫고나갔을 것이다. 그 한숨과 주저와 결의가 합쳐져 자신의 몸피를 늘리고, 제법 우묵한 얼굴이 돼 갔을 것이다. 가끔씩 찾아오는 들쥐와 굼벵이들이 그의 외로움을 조금은 덜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다 호젓한 기쁨에 잠겨 잠시 쉬고 있을 때 문득 자신의 아랫도리 밑으로 들어온 호미 끝에 파여 어떤 왁살스러운 손아귀에 잡혀 나왔을 것이다. 어디 고구마뿐이겠는가? 한겨울 어린 보리는 자신의 몸을 누르는 추위를 견디느라 나사못처럼 천천히 잎을 돌려 내민다고 한다. 눈이며 서릿발 같은 것들 들어올리느라 머리와 몸 비틀며 키를 늘인다고 한다. 식물의 생장에서 배우는 예지다. 인간이 더 이상 이 세상의 주인이니 하는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건 확실하다. 시인은 대책 없이 땅만 파내려가던 고구마의 옹고집을 단숨에 불과 열로 익혀내는 건 그 붉은 ‘덩이뿌리’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한다. 긴 노동의 대가(代價)로 일구어낸 곡절한 사연을 가진 생을 아무 생각 없이 단숨에 해치우지 말고, 그에게 미안하다고 가슴을 주먹으로라도 퍽퍽 치고 먹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충고한다. 고구마는 가난하고 쓸쓸한 시절 우리의 허기를 때워주던 다정하고도 충직한 친구였다. 하여 아무 생각 없이 접하는 주변의 뭇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없다면 우린 인간의 값어치를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예의가 자연과 우주와의 진정한 연대의 시작이 아니겠는가? 이 시를 읽으며 고구마를 삶아먹는 이 겨울밤, 오늘까지 나를 있게 한 모든 생명들이 가슴 속으로 한없이 밀려와서 절로 무릎이 꿇어진다. --------------------------------------------------------------------- 손진은 시인 약력 경북 안강 출생. 198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5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 저서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외 7권, 1996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경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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