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지에 대해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들이 문헌조사와 아울러 지표 조사가 이루어졌고 소극적이나마 보호 대책도 마련하였다.
광복 후 1962년 1월 21일 문교부에서 황룡사지를 사적 제6호로 지정하게 되었다. 이때까지 황룡사지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었고 그 주위는 논밭이었다. 그 까닭에 오랜 기간에 걸쳐서 절터에 남아있던 유구의 석재들은 민가의 건축용재로 이용되는 등 계속 훼손되고 있었다.
당시 황룡사 목탑 심초석은 농가의 토담의 일부였다. 1964년 목탑지 보존 차원에서 농가를 철거하고 토담도 제거하여 정리함으로써 심초석 위에 윗부분이 잘려나간 거대한 방형대석이 노출되었다.
그 해 12월 17일 심야에 이 방형대석 밑에 있는 심초석의 사리공 속에 들어 있던 사리장치가 도굴되는 어이없는 사고가 일어났다. 다행히 범인이 잡혀 훔쳐갔던 유물이 회수되어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그런데 범인이 과거 경주박물관에 근무했던 윤모라는 자여서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격이었던 것이다.
이 사리장치의 외함은 황룡사찰주본기로 일컬어지는 금동판으로 되어 있다. 찰주본기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신라 선덕여왕대인 645년에 당나라에 유학하고 온 자장이 건의하여 이 탑을 최초로 세우게 되었는데 높이가 80여 미터에 이르는 삼국 최대의 탑이었다.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지진과 벼락으로 탑이 기울어져 있어 48대 경문왕대인 871년에 들어와 크게 수리하면서 넣은 사리 관련 유물 목록을 기록해 두었다.
이 내용은 『삼국유사』 등에 적힌 내용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이로 인해 『삼국유사』의 기록 내용이 믿을만 하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되기도 했다.
1969년도에 들어와서 황룡사의 규모를 일부라도 밝혀 학술자료로 삼고자 간단한 발굴조사가 강당지 일부를 대상으로 실시되었으나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후 장기적인 정밀조사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1971년에 마련된 정부의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속에 신라의 통일염원이 서려 있는 황룡사지를 발굴 조사하기로 하였다. 이에 1976년부터 1983년까지 8년에 걸쳐 본격적으로 발굴 조사를 하게 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원래의 황룡사 담장 내 면적이 동서 288m, 남북 281m로 8만928㎡였으며, 늪지를 매립하여 대지를 마련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사찰의 건물배치는 중문, 탑, 3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배치되고, 탑의 앞쪽으로 종루와 경루를 좌우대칭으로 배치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강당의 좌우에도 독립된 건물이 있었음이 밝혀졌고, 동서남북으로 마련된 회랑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 독립된 상태였음도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