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대종은 길이가 1장 3촌, 두께는 9촌, 그 무게가 49만 581근으로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신종보다 4배나 크다. 만약 이 종이 남아 있다면 동양종으로 가장 큰 종이었을 것이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종이 주조된 시기는 성덕대왕신종보다 17년이나 앞선 경덕왕 13년(754)인데 시주는 효정이왕 삼모부인, 장인은 이상댁의 하전(下典)이다. 시주인 삼모부인은 이찬 김순정의 딸이다. 원래 경덕왕의 왕비였으나 경덕왕 2년(743)에 자손이 없다는 이유로 출궁 당하였다. 황룡사대종은 몽골병란 때 없어졌다. 전설에 의하면 몽골병들이 이 종을 보고 탐을 내어 몽골로 가지고 가려고 동해로 옮겨 배에 실었으나 너무 무거워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바다에 가라앉고 말았다. 이후로 풍랑이 크게 일면 해변 마을에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고 한다. 이 종을 바다로 운반한 내가 스무내[二十川]였는데 이 일로 인하여 이름을 대종천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지난 1982년 11월에는 주민들이 직접 종을 보았다는 제보에 따라 당시 한병삼 경주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하고 6명의 심해잠수부가 반경 500m의 해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종을 발견하지 못했다. 또 1989년 미군 비행기가 봉길리 앞바다에 추락했을 때 동원된 수색 팀의 도움을 받아 문화재관리국이 탐사에 나섰지만 종을 찾지 못했다. 이후 1997년 4월에도 해군을 동원하여 황룡사대종찾기탐사반을 꾸려 달포가 넘게 수중탐사를 벌였지만 역시 허사였다. 2013년에도 한 어부가 종을 직접 보았다는 제보에 따라 문화재청에서 한 달여 간 탐사를 하였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그런데 황룡사대종을 동해안까지 끌고 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1975년 성덕대왕신종을 구 박물관에서 현재의 박물관으로 안전하게 옮기기 위해 포장을 하니 전체 무게가 무려 30t이나 되었다. 황룡사종은 그 무게가 성덕대왕신종의 4배라고 하니 오늘날의 수송수단으로도 추령재를 넘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만약 동해에 빠뜨린 종이 있다면 가까운 감은사의 종이었을 것이다. 현재까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으로 밝혀진 것은 오대산(五臺山)의 상원사동종(上院寺銅鐘)이다. 그 명문에 따르면 통일신라 전기에 해당하는 725년(성덕왕 24)에 제작된 것이다. 높이 167cm의 이 범종은 원래 경북 안동의 문루에 걸려 있다가 조선 초기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신종은 현존하는 고대의 종으로 최대의 것인데, 높이가 364cm에 달한다. 명문에 구리 12만 근이 소요되었다고 명기되어 있는 큰 종으로 혜공왕 때인 771년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황룡사 대종의 제작 시기는 상원사동종보다는 29년이 늦고 성덕대왕신종보다는 17년 빠르다. 일본에 있는 신라종으로는 조성연대가 833년인 것[菁州蓮池寺鐘]과 904년 조성된 범종[松山村大寺鐘] 등 4점이 확인되고 있다. 한국의 범종은 학명으로까지 ‘한국종’이라고 불릴 만큼 독창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다. 특히 신라종의 우수성은 국내외에서 널리 알려진 만큼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현존하는 한국 범종의 상당수는 일본으로 반출되어 그곳에서 국보로 지정된 것만 해도 20여 점을 헤아린다. 황룡사 금당 벽에는 솔거가 그린 노송도가 있었다고 한다. 이 노송도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열전」 ‘솔거’ 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솔거는 신라 사람으로 보잘것없는 집안에 태어나 그 내력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타고난 재질로 그림을 잘 그렸다. 일찍이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렸는데, 나무둥치가 거칠게 주름지고 가지와 잎이 구불구불 서리었으므로, 까마귀·솔개·제비·참새들이 그 나무에 날아들다가 부딪쳐 미끄러져 떨어지곤 하였다. 여러 해가 지나 빛깔이 바래자, 한 스님이 다시 칠을 하였더니, 그 뒤로 새들이 다시는 날아들지 않았다. 솔거는 황룡사 금당벽화 이외에도 분황사의 관음보살, 진주 단속사의 유마상을 그렸다. 세상 사람들은 솔거의 그림을 신화(神畵)라 하였다. 분황사의 좌전에 있었다는 천수대비상이 바로 솔거가 그렸다는 이 관음보살상으로 매우 영험이 있어서 눈 먼 여자 아이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지은이가 알려지지 않고 있는 『동사유고(東事類考)』에 의하면 솔거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열중했으나, 시골에 스승이 없어 천신에게 가르침을 청하여 꿈속에서 단군(檀君)으로부터 신필을 받아 단군 화상을 1000여 폭이나 그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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