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함엽서
-이상희
세상에 나와 이로운 못 하나 박은 것 없다.
못 하나만 잘 박아도 집이 반듯하게 일어나고 하다못해 외투를 걸어두는 단정한 자리가 되는 것을 나는 간통하다가 생을 다 보냈다.
시를 훔치려고 소설을 훔치려고 외람된 기호를 가장했다.
아, 나는 남의 것을, 모든 남의 몫뿐이었던 세상을 살다 간다.
가난한 눈물로 물그림을 그리던 책상은 긍지처럼 오래 썩어가게 해달라. 단 하나 내 것이었던 두통이여, 이리 와서 심장이 터지는 소리를 막아다오. 그리고 떳떳한 사랑을 하던 부럽던 사람들 곁을 떠나는 출발을 지켜봐다오.
-당신의 참회록의 내용은 무언가?
생의 결정적인 한 호흡마다 자신에 대한 냉정한 성찰이 없다면 진정 우리는 양심을 가진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루소도 톨스토이도 ‘알몸의 진솔한 참회록’을 썼고, 이십사 년 일개월 나이의 윤동주도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참회록」)며 불면의 밤을 지새웠다.
여기 자신의 생을 살지 못하고 남이 해놓은 것에 내 것을 슬쩍 섞는 삶을 ‘간통’이라 하고 그 짓을 하다가 생을 다 보냈다고 참회하는 한 영혼이 있다. 그녀에게 간통은 시를 훔치고 소설을 훔쳐놓고는 짐짓 ‘외람된 기호’로 점잔을 빼는 ‘가장’ 행위다. 이제 그런 삶에서 벗어나 겨우 자신의 삶의 출발점에 선 두근거리는 화자의 모습을 본다. 알다시피 봉함엽서는 남이 볼까봐 사연을 적은 쪽을 접어 붙인 엽서다. 그러니 그녀의 참회는 들키고 싶지 않은 수줍은 고백쯤이 되겠다.
우리는 언제나 ‘간통’에서 벗어나 나 자신의 힘으로 세상에 대한 ‘떳떳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한번밖에 없는 생인데 남의 몫이었던 세상을 살다가는 건 억울하지 않은가. 주체적인 생활에 들어가는 것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두통으로 심장이 터지는 소리를 막아야 할 정도로 힘들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라. 떳떳한 사랑의 첫 단추는 그렇게 거창한 것만도 아니다. 못 하나 제대로 박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집이 반듯하게 일어나고, 하다못해 외투를 걸어두는 단정한 옷걸이가 된다. 자기의 힘으로 사소한 일 하나 하는 것이 사는 일의 핵심이라는 것을, 그러니 ‘자책의 눈물로 젖은 책상’은 혼자 ‘긍지처럼 썩어가게’ 놔두고, 이제부터라도 스스로의 삶을 살리라고 낮은 목소리로 자신에게 읊조린다.
시인이 굳이 「참회록」이라 하지 않고 「봉함엽서」라 제목을 붙인 이유는 무얼까? 겸손하게 ‘참회록’의 수신인을 자신에게로 오로지 향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참회록의 세련된 형식이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이렇게 묻고 싶다. 감히 공개하지는 못하고 자신에게라도 보내고 싶은, 들키고 싶지 않은 당신의 참회록의 내용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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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은 시인 약력
경북 안강 출생. 198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5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 저서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외 7권, 1996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경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