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지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 후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과 불상, 가사와 비단 등을 가지고 귀국해서 탑을 세울 것을 왕에게 청하였다. 선덕여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이 말하였다.
“백제에서 장인들을 불러와야 합니다.”
당시 신라에서는 이 탑을 만들 수 있는 장인이 없었던 것이다. 이에 보물과 비단을 주고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초빙하였다. 장인은 명을 받아 나무와 돌을 다듬었고, 벼슬이 이간인 용춘이 이 공사를 주관하여 200여 명의 하급 장인들을 통솔하였다.
당시 신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솔직히 인정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을 기술을 이용하고자 하는 열린 사고를 가졌던 것이다. 공사를 주관한 용춘은 훗날 태종무열왕이 되는 춘추의 아버지였다.
9층목탑의 기둥을 세우는 날 아비지의 꿈에 자기 나라 백제가 멸망하는 것을 보았다. 아비지는 걱정이 되어 공사를 멈추었다. 그러자 갑자기 대지가 진동하면서 깜깜해졌는데, 어둠 속에서 어떤 노승 한 명과 장사 한 명이 금당 문에서 나와 기둥을 세우고는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에 아비지는 생각을 바꾸어 그 탑을 완성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찰주기(刹柱記)」를 인용하여 황룡사 9층탑의 높이는 노반 위가 42자이고 그 아래는 183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장법사가 오대산에서 가져온 사리 100알을 이 구층탑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과 대화사 탑에 나누어 모셨다고 하였다. 또 일연스님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신라 제27대는 여왕이 임금이 되었다. 비록 도는 있지만 위엄이 없어서 구한이 침략하였다. 만일 용궁 남쪽의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운다면, 이웃나라가 침략하는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거란, 8층은 여적, 9층은 예맥이다.”
학자들에 따라 견해를 달리하고 있으나 탁라는 탐라로 제주, 응유는 백제, 예맥은 고구려라는 주장도 있다. 이후 황룡사 9층탑은 워낙 높아 5차례에 걸쳐 벼락을 맞고 또 화재로 피해를 입었으나 그때마다 복구를 하였다. 하지만 1238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에 타버린 이후 황룡사는 폐허가 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록에 의하면 서라벌에 상당한 규모의 지진이 58회, 민가가 쓰러지고 사망자가 생긴 것이 5차례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지진으로 탑이 무너지거나 손상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이미 그때 내진설계가 완벽하였던 것이다.
고려 명종 때까지 황룡사 구층탑이 그 장대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음을 당시 문신인 김극기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層層梯繞欲飛空(층층제요욕비공)
층계로 된 사다리 빙빙 둘러 허공에 나는 듯
萬水千山一望通(만수천산일망통)
일만강과 일천산이 한눈에 트이네
俯視東都何限戶(부시동도하한호)
굽어보니 동도에 수없이 많은 집들
蜂穴果蟻穴轉溟(봉혈과의혈전명)
벌집과 개미집처럼 아득히 보이네.
흔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교 건축물 ‘베스트 5’로 인디아의 브리하디스와라 힌두사원, 미안마의 쉐다곤 불교사원,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 이란의 나시르 알 물크모스크, 부탄의 파로 탁상 불교사원을 들고 있다. 수년전 쉐다곤 사원과 바티칸 대성당을 현지에 가서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예술성과 종교적인 의미에서 절로 탄성이 나오기는 했지만 만약 황룡사 9층탑을 비롯한 건물과 불상 등이 현재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황룡사는 이에 못지않은 세계적인 사원 건축물로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노반 위가 42자이고 그 아래가 183자라면 탑 전체의 높이는 225자이다. 1자가 고려척은 35.61cm, 주척은 20.45cm, 당척은 29.69cm로 차이가 있으나 학계에서는 황룡사9층탑의 경우 고려척을 적용하여 대략 80m 정도로 아파트 30층 높이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