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은 가난한 시절 우리 국민들의 배고픔을 달래주었던 친근한 부식에서, 오늘날은 훌륭한 일품요리로써 각종 요리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먹는 것에 관계하는 일은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성스러운 직업이다. 먹는 것이 풍족할 때 세상은 평화로워진다” 세계 최초로 인스턴트 라면을 개발한 닛신식품의 창업자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가 한 말이다.
1945년 8월 15일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써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낳은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당시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과 한반도로 남하하던 구 소련군은 양국의 합의로 우리나라를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분할해 북쪽은 소련이, 남쪽이하 일본 본토까지는 맥아더의 군정아래 내각을 구성했다. 비록 패전국이었지만 연합군 군사경계의 중요거점인 일본에서는 밀가루 등의 구호품이 넘쳐났다.
이를 아깝게 생각한 대만계 일본인 안도 모모후쿠는 중국인들이 밀가루로 국수를 만들어서 기름에 튀겨내어 장기간 보관하며 먹던 것에 착안하여, 면과 양념을 한 번에 넣고 끓여 먹기 편한 식사대용품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인스턴트 라면’의 시초였다.
우리 국민들에게 라면이 주식 아닌 주식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가난이었다. 1945년 해방의 기쁨도 잠시, 1950년 발발된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를 복구하기 위해 국민들은 굶주림과 싸우며 일했다. 오죽하면 자다가 굶어 죽었을까봐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식사 하셨습니까?”라는 말이 대면하는 첫 인사가 되었을까.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삼양식품의 창립자인 전중윤 회장이 정부의 원조를 받아, 일본의 명성식품으로부터 라면 기계 두 대를 들여와서 처음으로 ‘삼양라면’ 1호를 탄생시켰다.
쌀 부족을 대신하기 위해 1965년 박정희 정부는 ‘혼.분식 장려 정책’을 폈고 이후부터 국민들도 라면을 애용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서 당시로서도 대단히 저가인 10원에 판매 되었던 삼양라면은 단기간에 매출이 300배나 상승하는 엄청난 성장세를 보였다.
1965년 롯데공업의 신춘호 회장은 ‘롯데라면’을 만들어 삼양라면의 철옹성을 공략하고자 했다. 롯데라면은 1974년 회사명을 ‘농심라면’으로 바꾸면서,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캐치프레이즈로 국민들의 향수를 자극하며 판매율을 높이려 했다. 하지만 ‘껌이라면 역시 롯데’라는 CM송처럼, ‘라면은 삼양’이라는 고정관념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89년 제 6공화국 당시 검찰은, 라면 제조에 공업용 소기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한 통의 투서를 받고 ‘보건범죄 단속에 대한 특별조치법’과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삼양식품과 관련 업체 5개사 대표를 구속 입건했다. 유력한 신문들은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소의 노폐물’, ‘공업용우지’라고 대서특필하며 국민들의 혐오감을 선동했다.
시장 점유율이 60%에 육박했던 삼양라면의 판매율은 순식간에 6% 이하로 곤두박질쳤고, 삼양은 1000명의 직원을 해고하면서 폐업 직전까지 내몰리게 되었다. 무려 7년 9개월간의 긴 소송 끝에 1997년 삼양라면은 ‘공업용 소기름을 사용하지 않고 식용기름을 사용하였다’는 대법원의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삼양에게는 우지라면을 만들었다는 씻을 수 없는 불명예가 남겨졌다. ‘우지파동’사건을 기회삼아 농심라면은 삼양을 제치고 민심을 장악했다. 농심이 만든 라면 중에서도 1986년 출시 된 ‘신라면’은 한국 사람들과 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라면으로 손꼽혔다.
한때 ‘신라면 지수’까지 발표하면서 자존심을 높이던 농심은 ‘고품질 고영양’을 표방하면서 ‘신라면 블랙’이라는 명품라면을 출시했지만, 기존 제품보다 2배나 비싼 가격과 광고에 비해 터무니없이 빈약한 내용물로 인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1억5천만원의 과징금을 부과 받고 출시 4개월 만에 판매중단됐다. 하지만 농심은 신라면 블랙을 ‘블랙신컵’으로 재포장해서 일본과 미국에 수출하기 시작했고, 국내에서도 아시아나 항공의 기내식으로 제공하는 등 슬그머니 일반 소비자들에게도 판매를 재개하였다.
우리나라 라면의 역사는 새마을 운동으로 대명사되는 제3공화국과 유신헌법이 제정된 제4공화국을 지나서 군부정권이 장악한 제5공화국과 제6공화국의 대장정을 거쳐 온 대한민국의 역사였고, 세계 최빈국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기까지 국민들이 흘린 피와 땀을 함께한 건국의 역사였다. 부모님들의 휘어진 손마디는 오늘날 화려한 경제지수가 되었고, 가난한 고학생의 눈물은 세계 1, 2위를 다투는 월등한 학습능력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 이제는 현란하게 전시 된 수백 가지 종류의 인스턴트 음식들 속에서 하루의 풍요로움을 고민해야 하는 시절이 되었지만, 추운 겨울 허기를 달래주던 값 싼 라면 한 그릇의 따뜻함과 포만감은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또다시 우리에게는 기나 긴 겨울의 여정이 시작됐다. 하지만 유난히 춥고 마음 시린 올해 겨울의 끝자락도 다가올 것이다. 그 봄을 맞이하기 위해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여전히 나서고 있다. 자유와 평등과 진실을 위해 이 자리에 섰던 그날의 사람들처럼 오늘도 바람과 맞서는 수많은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있다. 봄은 다시 올 것이다. 그리고 오천만이 함께 부르는 ‘벚꽃 엔딩’과 같은 봄의 노래는 겨울을 이겨낸 행복의 나라로 인도할 것이다.
고종석은? 현재 고음질 음원사이트 그루버스의 사업본부장(COO)로 재직 중이며,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과 여성가족부 청소년유해매체물 음악분야 심의분과위원, 월간 재즈 피플(Jazz People), 파라노이드(Paranoid), 스트림(Stream), 웹진 벅스(Bugs), 음악취향Y, 이명 등에서 대중음악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음악 산업과 관련해서 음반사 인디(INDiE), 뮤직디자인, 갑엔터테인먼트에서 기획실장으로 근무했으며, SBS와 서울음반 등에서 음원 유통과 DB구축, 마케팅을 담당했다. 음악평론에 관련해서 월간 록킷(ROCKiT) 편집장을 거쳐 서브(Sub), 핫 뮤직(Hot Music), GMV, 오이 뮤직(Oi Music), 씨네 21 등에서 객원 기자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