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코치, 수치가 없다. 사람은 누구나 동물과 달리 수치심이란 것이 있으며, 타인의 감정을 헤아려보는 눈치가 있어야 하고, 타인과 나의 관계에서 자신의 처지를 알아 행동하고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염치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는 도무지 수치심을 모르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항상 법과 원칙을 말하며 법과 원칙은 자신들이 다 어기고, 적폐(積弊)를 없애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자신들이 적폐를 더 키우고, 비정상을 정상화시켜야 한다면서 자신들이야말로 정상을 모두 비정상화 시켜놓고, 눈치도 없고, 수치심도 없이, 염치없는 변명이라니......
어쩌다 대한민국이 야매공화국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야매’라는 말의 어원은 먼저 일본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일본말로는 야미(やみ)라고 발음하며 ‘뒷거래’ 혹은 ‘정식이 아닌 일’ 등의 의미를 가지며, 야미라는 일본말이 우리말로 바뀌면서 ‘야매’로 발음되기 시작한 게 아닌가 한다. 물론 우리말 사전에도 ‘야매’라는 단어가 있긴 하지만, 우리 말 야매의 의미는 ‘서툴고 어설프게 하는 일’로 어감 자체가 좀 다른 것으로 보여 진다.
야매 정치인, 야매 기업인, 야매 지식인, 야매 의료인, 야매 기술자 등 온통 야매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이제 누가 야매인지 분간하기조차 쉽지가 않게 되었다.
어떤 정치인은 맞불집회의 연단에 올라서서 불끈 쥔 주먹을 흔들어대며, ‘우리가 언제 그렇게 법대로 살았습니까? 여러분!’ 하고 외쳐 대기도 한다.
예전엔 그래도 불법인 줄 알면, 감추거나 부끄러워할 줄 아는 염치라도 있었건만, 이젠 아예 들어내 놓고, 불법이면 어떠냐? 힘이 있으면 되고, 힘이 곧 정의라는 논리가 아닌가?
삼치(三恥)가 사라지면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는 경계가 모호해지고, 사람과 동물의 경계가 무너지면 지켜야 할 인권도 찾기가 어렵다. 오로지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세상은 인간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동물과 달리 옷을 입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다른 동물과 달리 연약한 피부를 보호하고 체온을 유지하기 위함이며, 둘째는 치부를 가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인간이 부끄러운 곳을 옷으로 가리면서 또한 위선을 학습하게 된 것인데, 우리 마음속의 치부는 항상 체면이란 것으로 가리게 된다.
즉, 체면과 염치는 인격의 바탕이며 그 바탕위에 지식이라는 벽돌로 지성이라는 집을 짓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삼치가 없는 지성은 그나마 위선조차 던져버린 짐승이나 괴물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어쩌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그들의 알몸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위선이라도 부려보는 것이 최소한의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옛말에, 할애비 신주를 팔아먹더라도 눈치, 코치, 염치는 팔아먹지 말라고 했다. 치부가 모두 들어났으면 부끄러운 줄이나 좀 알아야지, 도대체 누구를 향하여 눈을 부라리고 주먹을 흔들며 큰소리들인가?
야매 입학은 야매 지식에 의해 야매 지성을 키우고, 야매 인격자를 양산한다. 소학, 중학, 대학의 공부가 중하지 않고, 육법(六法)이 별무소용이다. 우선은 위선이라도 좋으니, 우리 모두가 먼저 삼치(三恥)를 되찾아야 그래도 사람이 사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