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에 망년회니 신년회니 모임이 잦다. 자연히 술자리가 많아진다. 이런 술자리에 빠지지 않는 놀이가 있다. 바로 건배사 릴레이다. 건배사에는 건강, 화합, 비전, 소원 등 다양한 의미가 담겨있다. 세태를 풍자하는 건배사도 자주 등장한다. 센스 있는 건배사 하나로 술자리의 스타가 되는 경우도 있다.
며칠 전 시내의 한 음식점에서 목격한 일이다. 어떤 회사의 신년회 모임인 듯 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역시나 건배사 릴레이가 등장한다. 기발한 건배사에는 킥킥 웃음이 절로 나온다. 가만히 들어보니 가장 빈도가 잦은 ‘단어’가 도출된다. 무엇일 것 같은가? 이 모임의 건배사 키워드는 ‘사랑’이다.
사랑을 키워드로 하는 건배사는 크게 두 가지로 표현된다. 하나는 ‘사랑합니다.’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합시다.’이다. 전자는 넘치는 사랑, 즉 과잉사랑의 표현이다. 본인 자체가 사랑스러운 사람,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 열렬히 연애 중인 사람들이 이런 건배사를 애용한다. 반면 후자는 애정결핍이 반영된 구호다. 레츠 러브(Let’s love.)라니, 얼마나 사랑이 필요하면 이리 외친단 말인가.
건배사 ‘사랑합니다.’와 ‘사랑합시다.’는 이처럼 다르지만 공통점도 있다. ‘사랑’이란 말은 원래 은밀한 대화와 어울리지 않던가. 굳이 연인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 앞에 대놓고 말할 성질의 단어는 아니다. 그런데 요즘은 당당히, 공개적으로, 대놓고 사랑한다고 혹은 사랑하자고 말한다.
지금 경주예술의전당 1층에는 ‘그 남자 그 여자’라는 타이틀의 로비 전시가 진행 중이다. 이번 전시에는 남녀사이의 사랑을 표현한 작품들이 많다. 필자는 이중에서 김지애 작가님의 ‘가난한 날의 행복(2001)’이란 작품이 가장 좋다. 이유는 이렇다.
그림의 공간적 배경은 초라한 단칸방이다. 낡은 벽지 아래로 남루한 매트리스가 놓여있다. 그리고 그 매트리스 위에서 빨간 내복을 입은 여자와 흰색 런닝을 입은 남자가 사랑(키스)을 나누고 있다.
얼굴은 뭉개져 있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우리는 두 사람이 누구보다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음을 안다.
특히 1970~80년대 단칸방에서 신혼을 시작한 부부는 격한 공감을 하리라 생각한다. 이 그림이 전혀 외설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런 공감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말이 건배사에도 난무하는 세상이다. 필자는 이런 상황이 조금 불편하다. 사랑한다고 말한다 해서 꼭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이 아닌 건 아니다. 진짜 사랑은 표현하지 않아도 안다. ‘가난한 날의 행복’ 속 주인공처럼 말이다. 필자는 요즘 매일 마주치는 이 그림이 너무나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