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탑상」편 ‘황룡사장륙’조에는 이 불상을 모시기까지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황룡사 건물을 짓고 담장을 완성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 남쪽에 큰 배 한 척이 울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이 배를 조사해 보니 이런 글이 있었다.
“서축 아육왕*이 황철 5만7000근(약 9t)과 황금 3만푼(약 3Kg)**을 모아 장차 석가삼존상을 만들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해서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이렇게 빌었다. ‘부디 인연 있는 국토로 가서 장육존상을 이루어주기 바라노라’”
이 글과 함께 배 안에는 부처상 하나와 보살상 둘의 모형도 함께 실려 있었다. 고을 관리가 문서를 갖추어서 국왕께 보고하자 왕은 사자를 시켜 그 고을 동쪽의 높고 깨끗한 땅을 골라서 동축사(東竺寺)를 세워 세 불상을 편안히 모시게 하였다. 그리고 금과 철은 서울로 보내서 574년 3월에 장륙존상을 부어 만들었는데 단번에 이루어졌다. 장륙존상의 무게는 3만5007근으로 황금이 1만198푼 들었다. 두 보살상은 철 1만2000근과 황금 1만136푼이 들었다.
이 장륙존상을 황룡사에 모셨더니 그 이듬해 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땅이 한 자나 젖었으니, 이것은 대왕이 승하할 조짐이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진흥왕이 돌아가신 해는 576년으로 불상의 눈물이 흘러내린 지 2년 후가 된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스님은 다른 책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덧붙이고 있다.
아육왕은 서축 대향화국(大香華國)에서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후 100년 만에 태어났다. 그는 부처님께 공양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금과 철 약간을 모아서 세 번이나 불상을 조성하고자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때 태자만 참여하지 않았다. 이에 왕이 그 까닭을 묻자 태자가 이렇게 답했다.
“그 일은 혼자의 힘으로 성공하지 못할 것을 저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그것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그 배는 남염부제의 16개 큰 나라와 500의 중국, 1만의 소국, 8만의 촌락을 두루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모두 불상을 부어 만드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 최후로 신라에 이르러 진흥왕이 문잉림에서 이것을 부어 만들어 불상을 이루니 좋은 모양이 다 이루어졌다. 이후 아육왕은 근심이 없게 되었다.
인도대륙 대부분을 통합하고 불교의 전성기를 이룬 아육왕은 물론이고 세상 어느 나라에서도 하지 못한 불사를 신라에서 이루었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탄생하신 것은 B.C. 563년경이고 아소카왕이 태어난 것은 B.C. 269에서 273년 사이로 추정되니 위 기록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또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500년 동안은 무불상 시대이다. 무불상 시대라 함은 부처님의 모습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하지 않고 탑, 보리수, 법륜, 사자상 등으로 대신하여 나타내던 시기를 일컫는다. 따라서 아소카왕 당시에 불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불상을 만들고자 시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그냥 설화로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이어서 『삼국유사』에서는 대덕 자장(慈藏)이 중국으로 유학하여 오대산에 갔더니 문수보살이 나타나서 그에게 비결을 주면서 이렇게 부탁했다고 한다.
“너희 나라의 황룡사는 바로 석가와 가섭불이 강설하던 땅으로, 연좌석이 아직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의 무우왕(無憂王)이 황철 약간을 모아서 바다에 띄웠던 것인데, 130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너희 나라에 이르러서 불상이 이루어지고 그 절에 모셔졌으니, 이는 부처님의 위엄과 인연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무우왕은 바로 앞 이야기에 나오는 아육왕 즉 아소카왕이다.
올 병신년 한 해도 저물어 간다. 온통 나라가 벌집을 쑤신 듯하다.『논어』 「위령공」 편에 ‘군자구제기(君子求諸己) 소인구제인(小人求諸人)’이라는 구절이 있다. ‘군자는 허물을 자신에게서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찾는다.’는 의미이다. 남 탓만 하지 말고 나 자신을 삼가며 조용히 한 해를 마무리하고 싶다.
*인도 마우리아조 제3대왕인 아소카(Asoka, 재위 B.C.269~B.C.232년경)를 한역으로 아육왕 혹은 무우왕이라고도 한다. 인도에서 처음 출현한 대제국을 계승한 후 불교에 귀의하여 불적(彿跡)을 순방하며, 많은 스투파(탑)를 세웠다. 그런데 장륙존상이 완성된 해가 574년이니 아육왕이 보낸 황철과 황금으로 이 불상을 조성했다면 800년의 시차가 있다.
**『삼국유사』 「탑상」편에 의하면 성덕대왕신종은 구리 12만근으로 조성하였다고 하는데, 실제 이 종의 무게를 측정한 결과 18.9t이었다. 따라서 1근을 현대 도량형으로 환산하면 157.5g이다. 황철 5만7000근은 약 9t이 된다. 또 황금 1푼은 1/1600근이니 3만푼은 약 3kg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