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불타는 석가모니불 한 분이지만, 교리적으로 진리를 깨닫게 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과거7불과 함께 현재불·미래불 그리고 여러 보살이 있는 것이다. 과거7불이란 석가 이전에 이 세상에 출현하였다고 하는 일곱 분의 부처님이다. 과거 장엄겁에 나타난 비바시불·시기불·비사부불의 3불과 현겁에 나타난 구류손불·구나함모니불·가섭불·석가모니불 등 4불을 합하여 과거7불이라고 한다. 수년전 미얀마를 여행할 때 바간의 아난다 사원에서 현겁4불의 불상을 본적이 있다. 사원 내부에 동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구류손불·구나함모니불·가섭불·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었다. 『삼국유사』 「흥법」편 ‘아도기라(阿道基羅)’조에는 아도본비(我道本碑)를 인용하여 과거 서라벌에는 전불 7처가람이 있었다고 한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이전인 전불시대 서라벌 7곳의 사원에서 과거의 부처가 설법하였는데 현세에 와서 아도는 어머니로부터 전불시대의 가람터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가람터 7곳에 사찰을 세웠는데 천경림(天鏡林)의 흥륜사(興輪寺), 삼천기(三川岐)의 영흥사(永興寺), 용궁남(龍宮南)의 황룡사(黃龍寺), 용궁북(龍宮北)의 분황사(芬皇寺), 사천미(沙川尾)의 영묘사(靈妙寺), 신유림(神遊林)의 천왕사(天王寺), 서청전(婿請田)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용궁이다. 용은 물속에 산다. 용궁의 남쪽이 황룡사이고 용궁의 북쪽이 분황사라면 두 절 사이에 항상 물이 고여 있는 늪지나 연못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두 절 사이에 그런 곳이 없다. 하지만 과거 70년대 초반까지도 황룡사지 북쪽과 서쪽은 사철 늘 물이 그득한 논이었다. 그리고 1976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8년간 발굴조사를 한 결과 황룡사는 늪지를 매립하여 건립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당시 황룡사와 분황사 사이는 늪지였을 것이다. 惠日沈輝不記年(혜일침휘불기년) 부처님의 빛 침체된 지 오래되어 기억이 아득한데 唯餘宴坐石依然(유여연좌석의연) 오직 연좌석만이 의연히 남았구나. 桑田幾度成滄海(상전기도성창해) 뽕나무 밭이 몇 번이나 푸른 바다가 되었던고 可惜巍然尙未遷(가석외연상미천) 애석하게도 우뚝한 채 옮겨지지 않았구나.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할 당시 위의 찬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섭불의 연좌석이 이곳 황룡사에 있었다. 연좌석이란 좌선할 때 앉았던 돌이다. 그 연좌석이 『삼국유사』의 기록에서는 불전의 뒤에 있었는데 높이가 5,6자 정도이고 둘레는 겨우 세 아름*인데 위가 평평하였다고 하였다. 절을 세운 이후 두 차례의 화재를 겪으면서 돌이 갈라져 쇠를 붙여 보호하고 있다가 몽고의 침입을 겪으면서 불전과 불탑은 모두 불에 타버렸다. 이 가섭불연좌석에 대해 9층목탑의 심초석이 그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이는 금당지에 있는 장륙존상의 대석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단지 ‘불전의 후면’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금당지 뒤쪽 어디에도 연좌석이라고 추정할 만한 돌이 보이지 않는다. *『삼국유사』 원문에는 연좌석의 둘레가 ‘3주(三肘)’라고 하였다. 주(肘)는 팔꿈치에서 촌구맥(팔목의 맥박을 재는 자리)까지로 약 한 뼘 정도다. 둘레가 세 뼘 정도라면 연좌석으로는 너무 작아 주(肘)를 한 아름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