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여 년 전에는 황룡사지가 마을 속에 있었다. 필자는 어린 시절 집을 나서면 바로 황룡사지가 시야에 들어오는 마을에 살았다. 그런데 당시에 황룡사지 구층탑지와 금당지가 마을 속에 숨어 그 모습이 쉽게 눈에 뜨이지 않았다. 필자의 마을은 사리이고 황룡사지가 있는 마을을 구황룡이라 했다.
가끔 구황룡으로 친구집을 찾아가면 펑퍼짐한 바위가 마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지만 이곳이 대단한 사찰이 있던 자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일부는 담장으로 또 장독대로도 활용되는가 하면 밭에 이리 저리 흩어져 있기도 했다. 특히 자전거를 타고 장륙존상의 대석 위를 돌면서 묘기를 자랑하던 형들도 있었다.
차사나 기제사를 앞두고 늘 어머니께서는 ‘쟁깨미’를 주워오라 하셨다. ‘쟁깨미’란 옛 기와조각을 이르는 경주 사투리이다. 이 옛 기와조각을 부수어서 곱게 가루로 만들어 이를 물에 적신 볏짚에 묻혀 제기인 놋그릇을 닦았다. 그러면 반들반들 윤이 나는 것이었다. 당시 집 주위 논둑이나 밭둑에는 이와 같은 옛 기와조각이 지천으로 늘려 있었다. 가끔은 문양이 있는 기와조각을 발견하기도 했는데 이런 기와를 엿장수에게 가져다주고 엿과 바꿔 먹기도 했다.
이후 1975년 경주개발계획에 따라 황룡사지를 발굴하게 되어 이 마을 100여 가구의 주민들은 이주비를 보상받고 대부분 동천동에 새 택지를 마련하여 이주를 하고, 일부 주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황룡사는 공사를 시작한 지 2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완성된 사찰이다. 이곳은 본래 절을 지으려고 했던 땅이 아니었다. 『삼국사기』 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월성 동쪽에 신궁을 신축케 하였다. 황룡(黃龍)이 그 땅에 나타나므로 왕은 의심하여 불사(佛寺)로 고치고 황룡사(皇龍寺)라는 절 이름을 내렸다.”
진흥왕 14년 곧 계유년(553)의 일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황룡(黃龍)’을 ‘황룡(皇龍)’이라 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黃’과 ‘皇’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때 지으려한 궁궐을 모두 ‘신궁(新宮)’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다만 『삼국유사』 「탑상」편 ‘황룡사 장륙’조에서는 ‘자궁(紫宮’)이라고 했다. 자궁이란 황제 또는 신선의 거처를 의미한다. 궁궐을 지으려 했던 땅에 절을 지었다는 것은 궁궐 이상으로 사찰을 중요시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짓기 시작하여 주위에 담장을 쌓고 1차 공사를 마친 것이 진흥왕 30년 기축(569)이니 공사를 시작한 지 17년만이었다. 그 후 장륙존상이 완성된 것이 진흥왕이 죽기 2년 전인 574년 3월이었다. 다시 그로부터 6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선덕여왕 5년(636)에 황룡사9층탑이 세워졌다. 황룡사 대종이 만들어진 것은 120여 년이 지난 경덕왕 때인 754년이었다. 이렇게 해서 황룡사가 완성되기까지는 무려 200여 년이란 세월이 걸린 것이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비록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지만 황룡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사찰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공사 기간이 알려진 세계 최고의 건물이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한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성 가족) 성당이다. 1882년에 시작하여 1926년까지 44년 동안 공사를 진행하다가 가우디가 전차사고로 생을 마감하여 공사는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1953년부터 공사가 재개되어 현재까지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가우디의 사망 100주기인 2026년에 완공예정이라고 하니 중단된 기간을 포함하면 공사기간이 144년이다. 옛 신라의 황룡사는 세기의 건축이라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보다 공사기간이 무려 58년이 더 걸린 대역사였던 것이다.
따라서 황룡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사찰이 아니라 세계 제일의 사원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