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朱熹)와 더불어 정주학(程朱學)의 창시자인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가 배를 타고 가는 데 심한 풍랑으로 모두가 불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이들 형제는 태연했다. 배에서 내린 후 아우가 형에게 물었다.
“형님은 아무렇지도 않았습니까?”
아우의 물음에 형이 대답했다.
“사실은 불안했네.”
마침 옆에 스님이 계시기에 형제가 묻자 스님이 대답했다.
“대사께서는 마음이 불안하지 않으셨습니까?”
“내 마음은 배를 탄 일도 풍랑을 만난 일도 없소이다.”
전 국민이 지금 극심한 풍랑에 좌불안석이다. 모두가 스님의 마음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져본다.
이 어지러운 세상사를 잊으려 신발끈을 조이고, 도보로 6Km 남짓 떨어진 구황동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구황동은 필자가 유년을 보낸 어머니 품안과 같은 곳이다. 분황사 앞 동네에 살면서 분황사 우물의 물을 길어다 먹고, 늘 스님의 염불 소리를 듣고 자랐으며, 여름이면 절 경내에서 책을 읽곤 했으니 내 몸 속엔 아직 분황사가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당시 집을 나서서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널따란 보문들 너머 명활산, 그 오른쪽으로 늑대가 엎드린 이리뫼[狼山], 남으로는 금오산, 서로는 송화산과 그 너머에 선도산이 보이고, 등 뒤로는 북천 건너 금학산과 금강산이 에워싸고 있는 아늑한 곳이 바로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다.
여름이면 북천에서 물장구를 치다가 젖은 몸을 발가벗은 채 뙤약볕에 말리고, 겨울이면 월지에 가서 얼음을 지치다 논두렁에 불을 놓아 젖은 옷을 말리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살던 마을의 대부분은 분황사 사역(寺域) 정비로 헐리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어린 시절의 한 때가 아련히 떠오른다.
『삼국유사』 「탑상」편 ‘가섭불 연좌석’과 ‘황룡사 장육’조에 의하면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즉위한 14년 계유(癸酉; 553) 2월에 용궁 남쪽에 대궐을 지으려 하니, 아홉 마리의 황룡이 그곳에 나타났으므로 이것을 고쳐서 절을 삼고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 하였다. 이 전설로 인해 황룡사 인근의 마을을 구황룡(九黃龍)이라 부르게 되고 이후 구황동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황룡사 자리에 9룡이 아닌 그냥 용이 출현했다고만 기술되어 있다.
또 구황동 일대에 황룡사, 황복사, 분황사 등 이름에 ‘황(皇)’자가 들어가는 아홉 사찰이 있었다고 하여 구황이라는 마을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구룡과 관련한 설화로는 명(明)의 호승지(胡承之)가 쓴 『진주선(眞珠船)』에 ‘용생구자설(龍生九子說)’이 있다. 용에게 아홉 아들 즉 비희(贔屭), 이문(螭吻), 포뢰(蒲牢), 폐안(狴犴), 도철(饕餮), 공복(蚣蝮), 애자(睚眦), 산예(狻猊), 초도(椒圖)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는 또 다른 구룡에 얽힌 설화가 있다.
석가가 태어날 때 사천왕과 범천, 제석천이 나타나 석가의 탄생을 축하했고 하늘에서는 아홉 마리의 용이 따뜻한 물과 찬물로 된 두 종류의 깨끗한 물을 석가의 몸에 뿌리고, 천룡팔부(天龍八部)가 음악을 연주하고 향을 피워 축복했다는 내용이 옛 경전에 기록되어 있다.
황룡사에 나타났다는 용은 후자와 관련한 설화임이 분명하다.
이 구황동의 중앙이 황룡사터 주위에 있던 구황룡이고, 그 남쪽은 구역[현 양지마을], 동쪽이 신선이 내려왔다는 강선(降仙)마을, 북쪽으로는 활리(活理)로 불리다가 모래가 많다고 하여 이름 지어진 사리(沙理)마을이 있다.
지명에 얽힌 이야기만큼이나 오래 전부터 이곳에는 유서 깊은 사적이 많다. 전불칠처가람인 황룡사지와 분황사를 중심으로 미탄사지, 구황동 폐사지 등이 있고, 낭산 서쪽에는 절의 흔적인 목탑지가 있으며, 황룡사지 서편으로도 당간지주 일부와 두 기의 탑이 있어 황룡사와는 또 다른 사찰이 가까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문마을이 바라보이는 동쪽에는 큰 고인돌이 있어 정월 대보름에는 이 바위에 올라가 달을 맞이하기도 했었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달을 제일 먼저 보는 사람이 그해에 장가를 든다는 이야기가 있어 건장한 청년들이 다투어 이 고인돌 위로 올라 달이 떠오르면 환성을 지르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