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학연구원(원장 박임관)은 지난 13일, 일본 나라시 아스카엔과 1920년대말~30년대초, 당시 37세로 교토제국대학 공학부 건축학교실 조수였던 노세 우시조(能勢丑三)가 유리건판 필름에 촬영한 경주문화재 관련 각종 사진 2500여 장에 대한 조사 및 국내 소개를 위한 계약을 체결해 초미의 관심을 끌고 있다. 국내에선 아직 미공개된 이 사진 자료는 지난 2014년부터 소장처와 교섭 끝에 이루어 낸 결실로 연내에 조사 및 재촬영작업 등을 거쳐 내년에 보고서 작성과 전시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일본인 고고학자 노세 우시조는 1926년 10월 서봉총 발굴을 위한 스웨덴 황태자 일행의 경주방문에 동행해 한국과 인연을 맺은 후 1931년까지 당시의 경주 문화재와 발굴현장을 유리필름에 남겼다.
적석목곽분 서봉총 발굴 현장 수행단의 일원이었던 노세 우시조는 이 방문이 자신의 일생에 중대한 전환점으로, 이 일이 그에게 식민지 조선에서의 문화재 조사에 열을 올리게 하는 결정적 동력을 제공한다.
재력이 만만치 않았던 그는 경주 방문을 계기로 조선의 문화유산에 매료돼 사비까지 털어 한동안 조선 각지를 뒤지고 연구하는 생활을 계속한다. 노세는 1926년 경주 방문 이래 1931년까지 모두 10차례에 걸쳐 조선을 찾아 유적 견학과 (발굴)조사, 그리고 문화재 복원을 벌인다. 그는 한국 십이지상의 중요성을 가장 일찍 감지했으며 그와 관련한 선구적인 업적을 낸 중요한 연구자로 꼽힌다. 이 과정에서 노세는 경주 지역의 신라시대 십이지상과 개성 지역의 고려시대 십이지상 연구에 몰두한다.
1928년 경주 원원사 터를 답사하는 한편, 황복사터 석탑 기탄 터를 발굴조사 했다. 1929년 10월에는 원원사터에 대한 발굴을 속개한다. 이듬해 1월에는 원원사터를 실측 조사하고 성덕왕릉을 비롯한 경주 지역 신라시대 왕릉의 십이지상을 조사하는 등 1931년 말까지 조선에서의 문화재 조사 행적은 계속된다.
그가 조사한 유적 중에서도 원원사터에 완전히 붕괴된 채 방치되어 버린 삼층석탑을 발굴조사하고 나아가 이를 발판으로 그것을 복원한 일은 중요한 업적으로 꼽힐 만하다. 동탑과 서탑의 쌍탑이었던 원원사 석탑 발굴조사와 복원에 바친 그의 열정은 우리를 숙연케 할 만한 구석이 적지 않다.
이런 그의 노력은 마침내 1931년에 두 석탑을 완전히 복원하는 일로 마무리 짓는다. 특히 그가 남긴 사진 중 관심을 끄는 것은 당시의 경주 문화재가 처하고 있었던 상황을 보여 주는 사진일 뿐만 아니라 원원사지의 경우, 허물어진 동서쌍탑 터를 발굴하고 복원하는 전 과정이 유리판에 담겨져 있다. 이밖에도 경주의 12지 관련 능묘 사진과 개성의 고려왕릉, 화엄사 등의 사진까지 포함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매우 기대되고 있다.
귀중한 이 협약을 이끌어 낸 경주학연구원 박임관 원장은 “이번 협약은 경주학연구원이 2014년부터 추진해 온 일로, 내년 봄 즈음에 전시회를 할 것”이라면서 “현재 경주의 문화재는 복원 정비를 해놓은 것들이 많다. 복원 이전에의 상태를 모르는 상황이 대부분으로, 전시회를 계기로 1920년대말~30년대초 당시 경주 문화재 현황들을 사진기록을 통해 복원과 정비에 대한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 소중한 의의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원원사지의 경우만 보더라도 탑의 십이지신상과 사천왕상 등을 일본인들이 훼손시켰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임을 알수 있다. 내년 전시회는 이런 등속의 오류를 바로 잡는 일이 될 것이다. 문화재를 복원해서 실측해 모형을 만든 모형 사진도 있다. 모형으로 만든 뒤 복원을 했다는 기록 사진들도 있는 것이다. 현재 노세 우시조의 아들이 교토에 살고 있다. 그의 유품 중 경주 관련 기록물이 더 있는지도 파악하기 위해 아들과 접촉 중이다”고 전했다.
한국의 십이지상에 매료돼 파괴된 원원사 석탑 등을 재건한 노세 우시조의 업적이 실로 88년만에 그가 사랑했던 경주에서 빛을 보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