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다 보면 다양한 현수막을 본다. 주꾸미 식당 오픈이나 아파트 분양한다는 홍보성, 집권 여당을 비판하는 정치성, 졸음 운전을 하지 말라는 공공성까지 참 다양한 성격의 현수막을 볼 수 있다.
영세한 가게일수록 홍보가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이나 차가 많이 다니는 길목에 현수막 하나 걸어두면 참 좋겠다 싶을 거다. 집권당이 하는 걸 보니 답답하던 차에 야당의 섬뜩한 문구를 보며 대리만족을 하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넘치고 넘치는 이런 식의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가 제 기능을 못 한다는 점이다. 글자 그대로 남의 이목을 끄는(catch) 문구나 표어(phrase)이지만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너무 많고 또 과하다.
여기저기 걸린 현수막의 구구절절한 내용과 사정은 이해한다 하더라도, 흔히 보는 현수막의 대부분이 사실은 불법이다. 정해진 구역의 현수막 게시대에 걸지 않은 한 모두 불법이며 단속 대상들이다.
도나 시청의 자원순환과 같은 관련 부서에서 불법 현수막을 수거하지만 작업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단다. 벌금을 물린다고 하면 벌금을 내고서라도 계속 걸어놓겠다는 답이 돌아온다. 현수막으로 인한 홍보 효과가 벌금 손해보다 더 크다는 이유에서다. 철거를 하면 오토바이 타고 와서 번개같이 걸어놓고는 유유히 사라진다고 혀를 내두른다.
신고가 접수되면 단속차가 나와 불법 현수막을 거둬들이지만 바로 그 자리에 다른 현수막이 붙기 때문에 단속 전이나 후나 아무런 변화는 없다. 오래된 자료이지만, 2011년 31개 시군에서 모여든 수거 현수막 자원만 약 2500톤이라고 한다. 선거가 있었던 2012년에는 9월까지만 2900톤에 달하는 분량이 모였다고 한다. 가히 현수막 공해라 해도 무방하겠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대책은 없을까?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원에서 더 자주 손을 씻도록 표지판을 붙여 놓았다고 한다. 화장실 비누와 물비누 분무기 근처에 두 종류의 표지판을 붙인다. 하나는 ‘손을 깨끗이 씻으면 당신이 질병에 감염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다른 하나는 ‘손을 깨끗이 씻으면 환자들이 질병에 감염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2주 동안 병원 의사들이 환자와 접촉하기 전후에 손을 씻은 횟수를 셌고, 또 소모된 비누와 물비누 양을 측정해 보았다. 결과는 이랬다. ‘손을 깨끗이 씻으면 당신이 질병에 감염되는 것을 막아줍니다’고 쓴 표지판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물론 평소 하던 습관을 기준으로 그렇다는 말이지 의사는 하나같이 손을 안 씻는다고 해석하면 곤란하다.
반면에 ‘손을 깨끗이 씻으면 환자들이 질병에 감염되는 것을 막아줍니다’라고 쓴 표지판에서는 깜짝 놀란 만한 변화가 있었다. 의사들은 10% 더 자주 손을 씻었고, 비누와 물비누 소비도 45%가 늘었다는 것이다. 차이라고는 그저 ‘당신’이 ‘환자’로 바뀌었을 뿐인데 환자와 접촉할 의료진의 손은 이전보다 매우 깨끗해진 것이다.
표지판이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끔 동기를 부여했더니 그 결과가 달라진 것이다. 표지판은 병원 내 사람들로 하여금 ‘손을 좀 안 씻는다고 내가 병에 걸릴까?’라고 자문하게 만들었다. 의사와 간호사는 이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이미 병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손을 씻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거의 병에 걸린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 표지판 때문에 손을 더 자주 씻어야 할 이유는 없다.
반면에 환자라는 단어로 바뀐 표지판은 달랐다. 의사나 의료진으로 하여금 환자를 더 잘 보살펴야 한다는 ‘가치’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나는 의료 전문가이고 환자를 돌볼 도덕적 의무가 있어’라고 말이다. 그러니 손을 더 자주 씻게 된 것이고.
핵심은 현수막이 보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갖게 해주느냐 하는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깜짝 졸면 번쩍 저승’ 식의 현수막을 자주 본다. 졸음운전 하지 말고 장거리 운전할 때는 충분히 쉬어가라는 취지다. 운율까지 맞춘 멋진 현수막을 폄하하고 싶진 않지만 이걸 본다고 오던 잠이 달아나는 건 아니다. 차라리 구체적으로 주어를 명기하면 어떨까? ‘두 딸의 아빠’라거나 ‘막 사회 첫발을 뗀 당신’ 장거리 운전 조심 하세요~ 라고 하면 스스로 의미를 가지게 된 운전자는 더욱 안전 운행에 힘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