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한 인터뷰에서 만약 지구가 멸망해 다른 별로 가야 한다면 무엇을 가져가겠느냐는 질문에 ‘효(孝)와 경로사상이 아름다운 한국의 가족제도를 포함시킬 것’이라고 답했다. 우리는 예로부터 ‘효’를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해 왔다. 특히 조상을 모시는 제례의 경우 단순히 당대에 모시던 부모, 조부모뿐만 아니라 4대에 걸쳐 제사를 지내는가 하면, 성씨의 시조를 모시는 정성은 각별했다. 숭신전은 탈해왕릉의 동남쪽에 있는데 석탈해왕릉 보존회에서 소유·관리하고 있으며 1992년 7월 18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55호로 지정되었다. 숭신전은 석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광무 2년(1898)에 당시 군수였던 권상문(權尙文)의 제안으로 석씨 후손인 석필복(昔必復)이 인왕동 월성 안에 세웠다. 그 후 광무 9년(1906) 숭신전으로 편액을 받고 숭덕전, 숭혜전의 예에 따라 신라의 3성 시조 임금을 같이 봉사(奉祀)하게 되었다. 1980년 월성 정비 계획에 따라 월성 안의 민가를 철거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원래 자리인 월성 안에는 팔각 돌기둥만 남아 있다. 숭신전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입구인 홍살문을 통과하여야 한다. 홍살문은 궁전이나 능(陵) 원(園) 묘(廟) 궁전(宮殿) 관아(官衙) 등의 입구에 두 기둥을 세우고 붉은 칠을 한 문이다. 수직으로 세운 두 개의 둥근 기둥 위쪽에 수평으로 두 개의 나무를 나란히 세우고 그 두 나무 사이에 화살 모양의 나무를 수직으로 박은 형태에 지붕도 없고 문짝도 없으며 문의 가운데 윗부분에는 태극 문양이 있다. 태극 문양 위의 지창(枝槍)은 2지창과 3지창으로 나뉜다. 홍살문은 ‘붉은 화살 문’이라는 뜻이며 홍전문(紅箭門) 또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홍살문을 통과한 후 영녕문(永寧門), 경엄문(敬嚴門)을 지나면 탈해왕의 위폐를 모신 본전인 숭신전에 이르게 된다. 현재 숭신전의 구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본전을 가운데 두고 왼쪽에 접빈실인 상의재(尙義齋), 오른쪽에 참봉실로 사용하고 있는 상인재(象仁齋)가 있다. 숭신전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집이다. 평소에는 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어서 일반인들이 숭신전 안으로 들어가 볼 수가 없다. 매년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이곳에서 석씨 문중이 중심이 되어 향사를 지내고 있다. 영녕문 밖에는 1921년에 세운 ‘신라석탈해왕비명(新羅昔脫解王碑銘)’이라는 비와 비각이 있다. 비의 내용은 김윤식이 짓고 글씨는 윤용구가, 전서는 최현필이 썼다. 비의 내용 중 마지막 부분 일부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 아! 석씨왕은 하늘이 내린 신인(神人)이다. 까지가 울고 배를 대니 아진포가 빛나도다. 남해왕이 높은 식견으로 정사를 모두 맡겼더니 금옥(金玉)같은 교화가 팔방에 넘쳤도다. 위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아래로 전해주니 신라에 순(舜)임금의 법도가 행해졌도다.……” 『동경통지』에는 ‘토함산 정상에 석탈해사(昔脫解祠)를 세웠는데 이미 폐한 지가 오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숭신전 이외에 신라 왕의 제향을 받드는 곳으로 박씨 시조인 박혁거세왕의 숭덕전이 오릉 안에 있으며,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인 미추왕과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대왕과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위폐가 봉안된 숭혜전이 대릉원 담장 바로 바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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