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 경주의 정체성 회복’ ‘경주의 정체성을 살리자’ ‘경주의 정체성과 비전’ ‘경주의 정체성 확립’.... ‘정체성’.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어 온 말이요, 이것이 무슨 해법의 열쇠가 되는 마냥 우리는 남발을 하고 있다.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존재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 또는 그 특성을 가진 존재’라는 뜻이다. 좀 더 풀어 보면 상당 기간 동안 일관되게 유지되는 고유한 실체로서의 자기에 대한 주관적 경험을 포함한 뜻이다. 또 자기 내부에서 일관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과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어떤 본질적인 특성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 모두를 의미한다. 사실 그동안 정체성은 철학적·심리학적·사회학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 오던 개념이었다. 그러면 ‘경주의 정체성’은 어떻게 풀이할 수 있을까?
‘경주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 천년 왕도(王都)의 역사나 그 산물인 문화유산이 있을 수 있다. 그 다음은? 줄곧 경주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이 물음에 거침없이 답을 내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많이 사용하는 단어이면서도 말문이 막히는 것은 이 단어가 통상적으로 사람에게 쓰는 말이어서 그렇다.
좀 확대하여 보면 경주만이 가지고 있는 역사와 문화·예술, 지리와 토양, 전재지변과 기후, 사람과 성격, 주생산품과 특산물 등으로 나열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그동안 정체성이란 단어에 기대어 모든 것을 풀어 나가려 한 자신이 스스로 좀 어색해 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경주가 신라시대의 역사적인 사실과 관련된 구조물이나 문화·예술을 재현하여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한 것은 아닐까. 이런 일은 ‘경주역사 재현’으로 함축하면 어떠할까.
공교롭게도 또다른 ‘정체성(停滯性)’이 있다. ‘어떤 형편이나 상태가 진척되지 아니하고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특성.’ 문득 경주에는 이 단어가 더 어울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경주는 지금까지 정체(停滯)되어 오지 않았나? 문화재만 보여주기에 급급했지 이야기가 부족했고, 식당만 열었지 대표음식이 없었으며, 상품만 팔았지 친절이 부족했고 관광객은 찾으면서 배타적이었다. 이것이 경주의 정체성(正體性)이면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정체성(停滯性)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 ‘국제적인 관광도시’만 외치고 있다.
미국의 관광객과 중국의 관광객이 방문하였다고 하자. 어디로 안내하여 어떤 이야기를 들려 줄 것인가? 경주만의 고유 음식으로 식사를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할 것이고 경주만의 특산물이나 공예품을 사고 싶다면 어디를 안내할 것인가? 경주의 밤을 즐기면서 마시고 떠들고 싶다면 또? 이런 가상의 질문이 바로 외국인들이 경주를 외면하는 상대적인 이유이다. 이제는 ‘경주다움 구현’으로 바꾸어 나가야 하리라.
경주와 경북은 ‘실크로드’에 사활을 걸다시피 하여 어렵사리 그 노선상에 경주(신라)를 얹어 놓았다. 그리고 그 실크로드의 역사적 정체성(正體性)을 찾고자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정작 우리는 서쪽의 터키 이스탄불로 부터 동쪽의 경주에 이르는 아시아의 육로와 해로를 실크로드라고 강조하고 있다. 의도적이지는 않았겠지만 일본을 슬그머니 빼놓고 있는 것이다.
중국 시안의 당(唐)과 경주의 신라(新羅), 그리고 일본의 나라(奈良)는 700년대에 동북아시아의 전성기를 누리던 고대 국가였으며, 당시 국가간에 긴밀한 교류를 하였다. 이시기에 당연히 실크로드로 일컬어지는 루트상의 문물도 교류를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인연으로 경주는 이들 도시와 우호결연을 맺고 있으며, 나라는 46년, 시안은 22년째를 맞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나라에 까지 실크로드 지도를 연장하여야 하며, 신라의 역할을 강조하여야 할 것이다. 다만 육로를 통한 육지의 동쪽 끝이 신라, 경주임을 부각시키면 될 것이다.
서역으로 가는 실크로드의 중요한 요충지인 중국의 둔황(燉煌)은 인구가 경주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 오아시스 도시이다. 대표적인 관광지로는 막고굴과 명사산이며, 막고굴은 그 방대한 석굴사원에도 불구하고 관광객들에게는 불과 10개 안팎의 석굴만 공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은 거의 반나절에 가까운 버스투어를 하면서 밀려든다. 사주야시장으로 불려지는 거리는 온갖 음식이며, 특산물로 관광객의 주머니를 털기에 바쁘다.
일본 나라시는 경주보다 인구가 10만명 정도 많은 도시이다. 헤이안조쿄(平城京)로 비록 74년간 수도로 있었던 곳이지만 일본다운 풍광을 잘 살려내고 있어서 본받을 만하다. 시가지의 고가옥 디자인에 특산물과 음식 등은 우리가 따라가야 할 경주의 모습이기도 하다. 중국 시안은 규모부터가 방대하여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다들 잘 알고 있다. 종루와 고루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풍물 거리는 밤이면 불야성을 이룬다. 이들 도시가 고대 역사 문화재를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공통점이 있음에도 경주만 유독 경주다움이 없는 것 같다.
이제는 과감히 경주의 정체성(停滯性)을 버릴 때이다. 장기적인 계획아래 도시의 면모를 확 뜯어 고쳐야 한다. 시민과 시청이 합일점을 만들어 건축물이며 구조물, 조경, 조명 등을 고도답게 바꾸는 작업을 시작할 시점이다. 그리고 경주만의 잘거리, 볼거리, 먹을거리, 살거리를 채워 나가야 한다. 문화재의 야간 조명을 넘어서서 시내에까지 관광객이 넘쳐나는 그 일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시민단체와 시민이 발 벗고 나서야만 가능하다. 한우와 버섯 생산이 전국 최고라는데 이를 이용한 다양한 요리를 접할 수 있는 곳이 과연 몇 군데인가? 동네 식당의 분위기를 탈피하여 고도의 전통 요리집을 만들어 간다면..... 부추생산도 전국 수위라는데 ‘경주 정구지전’은 또 어떠할까.
왜 경주에 오지 않느냐고 한탄하지 말고 스스로 진정한 경주의 정체성(正體性)을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떨쳐버리고 일어서야할 정체성(停滯性)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끄집어 내 보자. 경주는 다른 도시가 가지지 못한 것을 너무나 많이 가졌다. 스스로 역사도시 양반이라 할 만큼 고운 심성도 가졌다. 지속가능한 무한한 자원이 있는 경주에서 나부터 바꾸면 반드시 경주는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