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지 않는다’고 한다. 왕조시대에 왕은 절대 권력을 가진다. 그런데 그 시대에도 서로 왕의 자리를 사양한 사람들이 있다. 신라 제3대왕인 유리와 제4대 왕인 탈해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남해왕이 죽은 후 맏아들인 유리가 덕망이 있는 탈해에게 왕위에 오르기를 권하였으나 탈해가 양보를 하였다. 이후 유리왕이 죽을 때는 두 아들이 있음에도 탈해가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나이 62세에 신라 네 번째 왕으로 등극한 탈해는 계림(鷄林)으로 국호를 삼고 내치에 힘쓰는 한편 백제, 왜, 가야 등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국력을 키워 나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탈해가 재위 24년 죽으니 성(城)의 북쪽 양정구(壤井丘)에 장사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언급한 ‘성’은 기원전 37년에 쌓은 ‘금성’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는 재위 23년 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소천구(疏川丘)에 장사를 지내고 유골로 소상을 만들어 대궐에 모셔 두었다가 훗날 태종 무열왕의 꿈에 탈해가 나타나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라’고 해서 그 말대로 했다. 이후 탈해는 동악신이 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사실로 인정한다면 탈해왕릉 또는 사당이 토함산에 있어야 한다. 또 처음 장사를 지낸 곳이 ‘양정구’와 ‘소천구’라면 언덕이라야 한다. ‘구(丘)’는 언덕이라는 의미이니, 산자락에 있는 현재의 왕릉과는 맞지 않는다.『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에는 탈해왕릉과 관련한 기록이 없다. 현재 탈해왕릉은 동천동 산 17번지 금강산 남쪽 끝자락에 있는 원형봉토분으로 사적 174호로 지정되어 있다. 왕릉 주변에는 아무런 시설과 표식물이 없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무덤이다.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이 왕릉은 밑지름은 14.3m이고, 높이는 4.5m로 신라 왕릉 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한다. 능 주변의 소나무가 봉토 쪽으로 다소곳이 허리를 굽히고 경건하게 왕께 예를 표하고 있는 듯하다. 이 무덤은 1974년 12월 31일 새벽 2-3명의 도굴꾼에 의해 도굴을 당했다. 당시 봉분 동북쪽 지점에서 너비 85cm, 깊이 440cm로 갱을 만든 후 도굴을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때 묘제가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임이 밝혀졌다. 굴식돌방무덤은 6세기 중엽 이후에 나타나며 탈해왕 재위 시는 목관묘 시기에 해당된다. 또 무덤의 위치도 초기의 고분권 지역인 경주평야 중심지를 벗어난 변두리 산록으로 옮겨졌다는 점에서 탈해왕 때인 1세기가 아닌 통일기 전후의 고분으로 추정된다. 또한 분구의 규모가 소형급이며 묘제가 굴식돌방무덤이란 점에서 통일기 전후의 무덤과 상통한다는 점, 아울러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였다는 설화 내용으로 볼 때 왕릉 내부에는 유골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 그리고 유골을 어떠한 사유에서든지 옮긴 묘는 보존하지 않는다는 점 등을 제시하며 학계에서는 이 무덤을 탈해왕릉으로 인정을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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