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꼬마에 눈이 머문다. 네 살은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귀엽고 어린 녀석이었다. 뒷짐을 지고 걷는 아빠랑 어떻게 그렇게 붕어빵인지 한참을 웃었다. 배를 쑥 내밀고 짧은 팔을 억지로 뒤로 잡고는 팔자걸음으로 걷는 부자(父子)의 모습을 보고 ‘씨도둑은 못 한다’는 어르신 말씀이 틀리지 않음을 다시 확인한다. 미국에서 재미난 실험을 했다. 연구자들은 수업에 참석한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고 두 개의 강의실로 분산 배치를 한다. A그룹에는 노인들의 삶과 행동의 제약에 관한 리포트를 쓰게 했다. 그리고 B그룹에는 젊은 사람들의 삶과 스포츠 활동에 대한 내용을 쓰게 했다. 다 쓴 사람한테는 보고서를 제출하고 강의실을 떠나도 좋다고 했다. 실험이 끝났다는 생각에 참여 학생들은 자유롭게 강의실을 나서고는 각자 갈 길을 간다. 진짜 실험은 바로 지금부터다. 실험이 끝난 줄 알았던 참여자를 ‘몰래카메라’처럼 촬영을 해본 것이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는데, 노인들에 대한 보고서를 쓴 학생들은 걸을 때 하나같이 마치 노인들처럼 걷고, 젊은이에 대한 보고서를 쓴 학생들은 아주 열정적이고 활기차게 걷더라는 것이다. 몰래카메라로 진행되는 후속 실험을 전혀 눈치 못 챈 학생들의 행동은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웠다. 바르크(Barg), 첸(Chen), 버로우스(Burrows)가 실시한 이 실험은 인간이 얼마나 외부 환경에 민감한 존재인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이 실험은 ‘뇌는 수많은 인상(印象)을 무의적으로 처리하고 행동으로 옮긴다’고 결론을 맺는다. 아들 녀석이랑 같이 양치를 해보면 알 수 있다. 녀석은 거울에 비친 아빠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따라한다. 오른쪽 어금니를 양치하는 아빠의 손동작과 흔들리는 고개의 각도조차 비슷하다. 양치를 한다기보다 칫솔을 들고 아빠 흉내 내기에 더 가깝다. 아이들은 그저 흉내를 낸다기보다는 그런 행위를 함으로써 타자와 자신을 동일시(同一視)하려는 고도의 심리적 맥락이다. 거울은 그런 의미에서 아빠와 아들의 완벽한 일치를 시각적으로 선사하는 정서적 기제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이런 과정이, 의식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진행된다는 점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훈습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연기 훈(薰), 더 적절하게 표현하자면 훈제치킨 할 때 그 훈에다가 익힐 습(習)을 쓴다.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고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난다’는 말이 딱 훈습이다. 훈습은 이처럼 어떤 관념이 인식에 남는 습관성이다. 만약 손에 청소기가 들려있으면 유독 먼지나 휴지만 눈에 띄고, 만약 손수건이 들려있으면 무의식적으로 뭔가를 자꾸 닦으려 한다. 혹 콧물이라도 나왔나 하고 자꾸 손수건을 코로 가져간다. 부지불식(不知不識) 간에, 다시 말해 생각하지도 알지도 못 하는 사이에 행동한다. 좋은 습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손에 십자가나 염주가 들렸다는 이유로 행동이 조심스러워진다.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권장된다. 문제는 부정적인 경우다. 무의식은 젊은이도 어르신처럼 걷게 만드는데, 하물며 도박, 집착과 편협 등 부정적인 심리가 무의식과 결합한다면 그 결과가 어떨지는 불 보듯 뻔하다. 훈습은 인간에게 있어 양날의 칼이다. 불교 인식론(認識論)에서는, 인식의 저장 창고에 가득한 기억의 씨앗들이 그 소유주의 행동을 규정한다고 본다. 그래서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 눈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해코지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진실하고 편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문을 안 잠그고도 잘 살고 도둑맞는 법이 없다. 불안은 ‘불행을 미리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책에서 본 기억이 있다. 하얀 캔버스에 뭔가를 그렸다가 지우기는 쉽지 않다. 이제 더 이상 흰 바탕이 아니니까 말이다. 덧칠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마음이란 캔버스는 다르다. 슬펐다가도 깔깔거릴 수 있다. 기분 좋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우울하기도 하다. 마음이 마음대로 바뀌는 것은 그것이 흰색이 아니라 차라리 투명에 가까워서 그런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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