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해는 왕이 될 자질을 갖춘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탈해는 아진의선이라는 노파를 어머니로 삼아 고기잡이를 하여 봉양하면서 학문에 힘쓰고 지리를 익혔다. 탈해가 어릴 때 지팡이를 끌며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에 올라 무덤 같은 돌집을 지어 이레를 머물렀다. 서라벌을 내려다보니 초승달 같은 봉우리가 보이는데 길지(吉地)였다. 산을 내려가서 찾아보니 호공의 집이었다. 그는 꾀를 써서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옆에 묻어 두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그 집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 “이 집은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집이다.” 호공이 그렇지 않다고 하여 다투니 결말이 나지 않아 관가에 고했다. “무슨 증거로 이 집을 너의 집이라고 하느냐?” 관리가 묻자 탈해가 태연히 대꾸했다. “우리는 본래 대장장이인데 잠시 이웃 지방으로 나간 사이에 이렇게 다른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땅을 파 보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말대로 하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탈해가 그 집을 빼앗아 살게 되었다.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저잣거리에서 파자점(破字占)을 본 적이 있는데 무심코 물을 ‘문(問)’자를 골랐다. 점쟁이는 글자모양을 가리키며 ‘오른쪽으로도 임금 군(君)이요, 왼쪽으로도 임금 군이니 틀림없는 인군지상(人君之相)’이라고 했다. 돌아선 이성계가 한 행인에게 부탁했다. ‘저 점쟁이에게 파자점을 보되 물을 문자를 고르시오.’ 이에 행인 역시 물을 문자를 짚었으나 점쟁이의 예언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문(門) 가운데에 입(口)을 대고 있으니 걸인지상(乞人之相)이로군.’ 우리 같은 범인이 호공의 집을 빼앗았다면 사기꾼이 되지만 탈해이었기에 지혜가 출충한 사람으로 결국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 이후 남해왕이 탈해가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맏사위로 삼은 후 그에게 대보(大輔)라는 벼슬을 주고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겼다. 호공은 탈해왕이 즉위한 이후 대보 벼슬을 하였다. 탈해가 임금이 되기 전에 하루는 동악(東嶽)에 올랐다. 더운 날씨에 무술을 연마하고 사냥을 즐기다보니 목이 말랐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샘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인에게 샘을 찾아 물을 떠 오도록 일렀다. 나무 밑에 앉아 땀을 식히면서 기다렸으나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탈해가 골짜기로 내려가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하인의 입에 표주박이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인은 이를 떼어 내려고 안간 힘을 다하고 있었다. 탈해가 가까이 다가서자 하인은 울면서 용서를 빌었다. 물을 떠서 가다가 하도 목이 말라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 한 모금 마신들 어떠랴 해서 표주박을 입에 대는 순간 입술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가깝거나 멀거나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주인 먼저 물을 마시지 않겠사옵니다.” 탈해가 그의 잘못을 용서해 주자 그제야 표주박이 입에서 떨어졌다. 이후부터 하인은 탈해를 두려워하여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이 샘을 요내정(遙乃井)이라 하였다. 지금 석굴암의 석굴 아래 큰 돌확에 고인 물을 감로수(甘露水)라고 하는데 이 감로수를 요내정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석굴암 정상 가까이에 포수우물로 알려진 샘이 있는데 이 샘이라는 주장도 있고, 불국사에서 토함산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가 중간 쯤의 위치에서 오른쪽 골짜기에 있는 오동수, 또 불국사에서 석굴암 주차장으로 오르는 도중 동산령에 있는 찬물내기를 요내정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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