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우리는 단일민족임을 내세우고 이를 은근히 자랑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면서 이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으나 실은 아주 오래 전부터 많은 이민족이 우리 땅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기록상 가장 먼저 이 땅에 정착한 사람은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이다. 『삼국유사』 「기이」편 ‘가락국기’에 의하면 허황옥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이 땅에 와서 김수로를 만나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시조모가 되었다. 왜인들은 1-2세기경 삼한시대부터 일부가 한반도 남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처용랑 망해사’조의 처용은 당시 울산 지역에 살았던 아랍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 원성왕릉에 있는 무인석은 오똑하고 큰 코와 곱슬머리, 터번을 쓴 우람한 체구 등 신라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당시 아랍인들이 이곳에 정착해 살았음을 반증하고 있다. 화산 이씨의 조상으로 알려진 이용상(李龍祥)은 베트남 왕자로 권력투쟁 과정에서 밀려나 송나라를 거쳐 고려로 들어와 정착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대륙에서는 중국인뿐만 아니라 북방 유목민족인 거란족이나 여진족, 몽고족이 대거 우리 땅에 들어와 정착한 사실이 있다. 조선 인조 때에는 네델란드인인 벨테브레이가 귀화하여 박연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서 일생을 마쳤다. 임진왜란 때는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이었던 김충선(金忠善)이 귀화해 조선의 장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최근에 귀화한 사람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석탈해는 이 땅을 찾아 최초로 왕이 된 귀화인이 아니었을까? 석탈해왕은 신라의 네 번째 왕으로 재위 기간은 AD.57년에서 80년까지이다. 석씨의 시조인 탈해는 혁거세와 마찬가지로 알에서 태어났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다파나국(多婆那國) 왕이 여인국(女人國) 왕녀에게 장가를 들었다. 그 후 7년 만에 태기가 있어 큰 알을 낳았다. 왕이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그 알을 버리라고 했는데 왕비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비단으로 알을 싸고 보물과 함께 궤짝에 넣어 바닷물에 띄웠다. 그 궤짝이 처음 금관국 해변에 밀려들었으나 그곳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그냥 보내니 현 양남면 나아리로 추정되는 아진포에 닿았다. 때마침 해변에 살던 아진의선이라는 노파가 배를 당겨 궤짝을 열었더니 작은 아이가 있어 이를 데려다 길렀다. 장성하자 키가 9자요 인물이 수려하고 아는 것이 많았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이 아이의 성씨는 알 수 없으나, 처음 떠내려 올 때 까치가 울며 따랐으니 까치 ‘작(鵲)’자에서 새 ‘조(鳥)’자를 떼어 ‘석(昔)’자로 성을 삼고, 궤짝을 풀고 나왔으니 이름을 ‘탈해(脫解)’라 하여야 한다.” 『삼국유사』에는 탈해가 용성국(龍城國)왕인 함달파(含達婆)와 적녀국(積女國)의 왕녀 사이에 태어났다고 했다. 용성국은 정명국(正明國), 완하국(琓夏國), 화하국(花厦國)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가락국기’에서는 탈해가 수로왕과의 술법에서 지게 되어 서라벌로 달아난 것으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다파나국을 포함해 이들 나라는 모두 왜국의 동북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의 중심지가 나라나 교토였으니 이곳으로부터 동북방은 혼슈의 북쪽이거나 홋카이도이니 역시 일본 땅이다. 대보 벼슬을 지낸 호공도 왜인이라고 했는데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탈해 역시 왜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탈해와 호공은 신라 최초의 귀화인이 되는 것이다. 배에 실려 버려졌으니 망명인이라 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삼국유사』에는 탈해왕의 탄강지가 계림동 하서지촌 아진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1845년에 나라에서 탄강지에 하마비와 땅을 하사했다. 석씨문중에서 이곳에 유허비와 비각을 건립했다. 현재 이 비가 있는 곳은 양남면 나아리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