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이 기러기처럼 많은
-나희덕
낮은 담을 사이에 두고
절터와 논이 나란히 엎드려 있다
탑이 기러기처럼 많은 고장이라 하지만
끌과 정으로 다듬어진 돌만이
탑을 이루는 건 아니다
한 포기의 벼가
제 몸을 힘껏 일으켰다 떠나간
밑둥들 역시
푸른 탑을 받치고 있던 기단 아닌가
지푸라기 기단 위에서 낟알을 쪼느라
고개 숙인 두루미들, 그 목선은
날렵한 상륜부 같고
찬 하늘로 날아간 기러기들도
제 몸속에 탑을 모시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지친 그림자를
바위 그림자 속에 숨겨두고
거기 기대 앉아 까무룩하니 졸았는데
내 마음에 그 사이 누가 탑을 쌓았다 허물었나
저녁 햇빛이 앉았다 간 자리
둥그스름한 기단처럼 남아 있으니
-이면을 오래 바라본 자가 도달한 통합의 세계
시인은 가을 들녘, “절터와 논이 나란히 엎드려 있는” 낮은 담 사이에서 “탑이 기러기처럼 많았다”는 『삼국유사』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전성기의 서라벌은 17만 8936호 인구 90만, 바둑판 모양의 계획된 도로, 아궁이에 숯을 사용하여 그을음이 없었던 아름다운 수도였다.
시인은 그러나 화려와 장엄의 외면만을 보지 않는다. 바로 빛과 그림자를 두 개로 보지 않는 통합적 사유 때문이다. 그 사유는 “끌과 정으로 다듬어진 돌만이/ 탑을 이루는 건 아니다”라는 인식에서 싹튼다. 벼를 베고 남은 자리인 밑둥 역시 벼의 “푸른 생을 받치고 있던 기단”이며 “지푸라기 기단 위에서 낟알을 쪼느라/ 고개 숙인 두루미” 목은 날렵한 상륜부가 된다. 하늘을 나는 기러기조차 “제 몸 속에 탑을 모시고 있다” 마지막 두 연은 이 사유가 탄생한 지점을 보여준다.
“지친 그림자를/ 바위 그림자 속에 숨겨두고/ 까무룩하니 졸았는데” 저녁햇빛이 “탑을 쌓았다 허물었는지” 자신이 앉았던 자리가 바로 “둥그스럼한 기단”이 되는 경이를 본 것이다. 지친 그림자가 빛을 만든다는, 이 모순형용과 역설은 시선이 어느 한 곳으로 치우쳤다면 도달하기 어려운 세계이다. 그러나 그림자를 오래 바라본 자가 이룬 아름다운 통합의 세계는 넉넉한 풍요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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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은 시인 약력
경북 안강 출생
198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5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 저서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외 7권, 1996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경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