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발생한 강진과 여진으로 심리적 불안감을 호소하는 이들을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지진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건물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지진 멀미 증상, 작은 소리에도 놀라거나 겁을 먹는 사례, 강진 당시 경험했던 광경이 머릿속에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 등이다. 전문가들은 재난 이후 심리적 외상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심리지원을 받으면 이러한 증상들이 앞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등 정신건강문제로 악화하는 것을 막는데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다. 이 같은 맥락에서 지난 4일 더케이호텔경주에서 9.12 지진 이후 정신적 불안을 안고 있는 사람들의 심리지원을 맡고 있는 의료기관 관계자, 재난관련 공무원, 심리상담사 등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 있었다. 경주시보건소가 주최하는 제21회 치유캠프로, 조벽 교수, 최성애 박사(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심리치료전문가)가 ‘9.12지진 트라우마 심리응급법’을 주제로 특강했다. 이들은 지진뿐만 아니라 위급한 재난현장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HD행복연구소의 감정응급처치법에 대해 강의 및 실습을 진행했다. 비록 현장에서 심리지원을 하고 있는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었지만, 일반인들도 지진 트라우마 극복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돼 이날 강연의 주요내용을 요약해 본다./편집자주 -감정응급처치법 알고 보면 ‘간단 명료’ 감정응급처치법은 지진 발생 후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외상 후 스트레스성장(PTSG)’으로 유도하는 것이 목표다. 즉 제대로 된 감정응급처치법을 통해 지진으로부터 받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극복함으로써 성장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조벽 교수에 따르면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는 각성(과민반응), 침투(충격의 재경험), 회피 등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각성현상은 지진을 겪고 난 후 외부반응에 훨씬 민감해지면서 작은 일에도 깜짝 놀라거나 짜증을 내고, 같은 위기가 지속되거나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좀 더 심하면 공황발작, 광장공포증, 사회공포증, 특정 공포증, 심각한 우울증 등이 나타날 수 있다. 지진이 나도 모든 사람이 같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폭넓은 반응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음단계로는 지진이 끝났는데도 계속해서 지진을 생각하고, 반복적으로 그 상황이 떠오르는 ‘침투 증상’이라고 하는데 반복적 회상(영상, 꿈 등)을 통해 극심한 공포를 느낀다. 세 번째는 회피다. 지진을 겪은 장소를 피하려고 하고,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다가 좀 더 심하면 술, 약물 중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 같은 지진 트라우마 증상을 심리요원의 개입으로 회복 또는 성장으로 유도하는 것이 감정응급처치법의 목표다. 재난 시 물리적 재해로 인한 출혈, 골절, 감염, 심장마비 등에 대한 응급처치법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처럼 감정응급처치법도 이와 같다는 것이 조 교수의 설명이다. 조 교수는 “응급처치법은 별거 아니어야 한다. 특별한 사람, 특별한 경우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적합하지 않다. 누구나나 아무 때나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응급처치법”이라고 강조했다. -감정응급처치법 5단계 순차적 진행은 ‘철칙’ 조벽 교수는 감정응급처치법은 안전감-안정감-연결감-효능감-희망감 5단계로 나뉘며, 순차적으로 진행해 생존자가 가지는 감정을 부정상태에서 중립상태, 긍정상태로 이동시켜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지진으로 놀라고, 공포스러운 부정적 감정 상태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사람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그 다음 안심시키고 효능감을 맛보게 해주고 희망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는 것. 특히 매단계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제시한 포착하라(Look), 경청하라(Listen), 연결하라(Link) 등 ‘3L’ 철칙을 실행하는 것이 응급진단치료방법이다. 조 교수에 따르면 1단계 ‘안전감’에서 중요한 것은 재난 상황에서 신체적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이며, 이 때 생존자와 주변을 돌아보고,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응급처치 요원의 도움을 받는 등 3L 철칙을 적용해야 한다. 이어 ‘안정감’ 단계에서는 생존자의 몸과 감정 상태를 관찰하고 몸을 움츠리거나 떨 때, 쉽게 짜증 낼 때, 음식물을 먹지 않을 때 등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일 경우 심호흡을 반복하면 된다. 그러나 방향감각이 없거나, 눈동자에 초점이 없을 때, 격한 감정을 보일 때, 숨을 거칠게 쉴 때 등 감정이나 생각을 관리하는 기능이 일시적으로 마비된 상태로 특별응급처치가 필요할 때는 그라운딩을 통해 안정시켜야 한다. 그라운딩은 감정응급처치자의 안내로 오감을 순차적으로 되찾는 것으로 시각, 청각, 촉각 순으로 안정된 실체와 연결시켜야 한다. 예를 들면 시각적 연결은 생존자가 쉽게 볼 수 있는 의자, 창문, 옷 등 흔하고 감정적으로 중립적인 것을 찾아보라고 언급하면 된다. 조 교수는 “그라운딩의 경우 두뇌에 가장 많은 신경다발이 있는 시각이 제일 먼저다. 다음에 청각 그러고 나서 촉각 등의 순서로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힘들어진다”고 강조했다. 셋째 ‘연결감’은 풍랑을 만난 작은 배가 큰 배에 연결되면 마음이 안정되는 것처럼, 안심감을 느끼게 해주는 단계다. 특히 이 단계에서 조 교수는 반드시 피해야 할 말과 권장하는 대화에 대해 강조했다. 조 교수는 “‘정신 좀 차리세요’, ‘잘 하고자 하던 일이니 너무 낙심마세요’, ‘다 계획대로 되고 있으니 걱정마세요’ 등은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정상적이 생각과 행동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비정상적”이라고 밝혔다. 대신 상대방을 존중, 경청, 배려하는 자세로 ‘도와주어도 되겠냐’고 묻고, ‘답을 강요하거나 보채지 말고 기다려 줄 것’ 등을 권장했다. 특히 어른들이 아이한테 하는 말 중 ‘바보같다, 넌 참 한심스럽다, 이렇게 밖에 대처 못해’라는 말은 아이에게는 지진 공포에 더해 2중 3중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말 자체가 아이에게 큰 상처가 남게 되고 부정적인 인생 대본이 생기고 패배자 사고방식이 지배하게 되므로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3단계 이후부터는 희망을 전달하라” 네 번째 단계인 ‘효능감’은 앞서 3단계가 반드시 이뤄지고 난 뒤 생존자가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게 해줘야 한다. 스스로 본인의 감정과 욕구를 알아차리게 돕고, 본인을 위해서 스스로 무언가를 하도록 격려하고 도우는 단계다. 조벽 교수는 “피해자가 도움만 받는 존재로 남아서는 안 된다. 그러면 영원히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피해자로 남아 있으면 정신적 불구가 된다”면서 “효능감은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큰 일이 아니고 남을 위해 기도 또는 불공드리는 것이어도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피해자가 아니라 도움을 받고 나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바꿔줘야 한다”며 “효능감이라는 것은 내가 이런 것을 함으로써 나에 대한 긍정적인 경험을 쌓아 가는 것이다. 부정적인 경험을 긍정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를 심리요원이 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 5단계 ‘희망감’은 생존자가 유사한 위기상황에 다시 놓이게 됐을 때 스스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다. 특히 본인 주변 다른 사람을 돕거나 상황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기도 하다. 조 교수는 이 단계에서 심리요원은 생존자의 감정을 상담전후와 비교해 다시 살펴보고 회복을 기원하며 작별해야 한다고 전했다. -“심리요원 스스로 먼저 보호해야” 마지막으로 조벽 교수는 현장에 투입된 심리요원들이 스스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조 교수는 “심리요원의 초기 희망과 열망이 실망과 절망, 그리고 원망의 단계로 변해 갈 수 있다”면서 “감정응급처치법의 가장 기본은 남을 돕기 전에 자신을 먼저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장의 위기 상황이 종료돼도 심리요원은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 자체가 심리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 이에 따라 “심리요원들은 자신의 상태를 살피고, 동료 요원이 본인의 상태에 대해 하는 말에 귀 기울여야 하며 문제가 있으면 심리지원을 즉시 그만 두어야 한다”면서 “생존자 모두를 살려야 한다는 것과 남에게 인정받기를 기대하는 것 등은 금물”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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