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천양산촌의 촌장인 알평(謁平)이 탄강하였다고 전해지는 이곳 표암은 경상북도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되어 있다. 해발 20m정도의 봉우리로 탈해왕릉과 70m정도 떨어져 있으며, 알천 즉 북천과는 약 7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삼국유사』 「기이」편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진한 땅에는 옛날에 6촌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양산촌이니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이다. 촌장은 알평이니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에 내려왔으며 이가 급량부 이씨의 조상이 되었다”
이어진 내용에 의하면 기원전 69년 6촌의 촌장들이 자제들과 함께 알천의 언덕에 모여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삼고 나라를 세울 것을 의논하였다.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다 양산 나정 우물가에 흰 말이 꿇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곳을 찾아가서 혁거세를 발견하였다. 그때 그들이 올랐다는 높은 곳이 어쩌면 이곳 표암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표암 유허비각 앞에 서서 멀리 남쪽을 바라보면 나정 쪽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경잡기』 권1 ‘산천’조에는 표암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표암은 경주부의 동북 5리에 위치하는데, 이알평이 탄강한 곳이다. 속전에 의하면 이 바위가 나라에 해를 미칠 수 있으니 박을 심어 덮었다고 하여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경주풍물지리지』에는 이곳 표암과 관련하여 세 가지 전설을 소개하고 있다. 첫째, 신라 때 월성에서 이 바위가 마주 바라보이므로 고을의 정기가 위압 당한다하여 박을 심어 덩굴이 바위를 덮어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둘째, 알평공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가지고 온 박을 이곳에 두었더니, 순식간에 자라나 바위를 덮었다. 혹은 그 박이 한없이 자라 저절로 쪼개졌는데, 그 속에서 이 바위더미가 나왔다.
셋째, 옛날 동천에 살던 한 할머니가 이 바위 밑에 박을 심었더니 박 덩굴이 자꾸 자라서 온 바위를 덮었다. 지금 경주 이씨 시조 비각 옆에 큰 박이 열렸는데, 그 속에서 옥동자가 나와 데려다 기르니, 이 아이가 자라 후일 알천양산촌의 촌장에 오른 알평공이다.
이곳의 지형적인 특징과 전해지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표암봉이 소도 유적의 하나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경주이씨대종보에 따르면, 알평은 6촌의 촌장과 협의한 후 박혁거세를 왕위에 세우고, 벼슬은 아찬에 올라 군사업무를 맡아보았다. 그 후 유리왕 9년(기원전 32년)에 신라 건국의 공을 인정받아 이씨 성을 하사받았으며, 법흥왕 23년에는 문선공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무열왕 3년엔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
하지만 시조 이알평 이후 35대까지 세손이 전해 내려오지 않고, 신라 말에 들어와 소판 벼슬을 한 진골 출신의 36대손 이거명에 이르러 본관 성씨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주이씨는 고시조를 이알평으로, 중시조를 이거명으로 삼고 있다.
‘알평(謁平)’과 관련하여 ‘알(謁)’은 ‘거룩한’ 또는 ‘신성한’의 뜻이며 ‘평(平)’은 ‘잘 다스린다’는 뜻으로 이름이라기보다는 존호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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