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김종길
여울을 건넌다.
풀잎에 아침이 켜드는
개학날 오르막 길.
여울물 한 번
몸에 닿아 보지도 못한
여름을 보내고,
모래밭처럼 찌던
시가(市街)를 벗어나,
길경(桔梗)꽃 빛 구월의 기류(氣流)를 건너면,
은피라미떼
은피라미떼처럼 반짝이는
아침 풀벌레 소리.
-구월 아침, 심장처럼 반짝이는 풀벌레 소리
가을이다. 무성한 잎들도 무게를 내리는 계절이다. 가을은 어디서 오는가. 천둥과 태풍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그 변화는 미세한 결에서 시작된다. 여기 반세기를 우리 곁에 있으면서 가을이 올 때마다 그 기미를 가슴에 파동치게 하는 시 한 편이 있다.
개학날이다. 개울을 건너다, 아주 작은 그러나 또렷한 변화가 화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풀잎에 아침이 켜드는” 장면이 보인 것이다. 일곱 시 좀 넘은 시각이었으리라. 그 때 첫 햇살이 풀잎사귀에, 정확히 말하면 잎새에 맺힌 이슬에 비쳤다. 여름에는 느낄 수 없는 미묘한 변화. 가을 입새에 접어들었다는 말이다. 개학날이라고 하여 이 시의 화자를 어린이쯤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시에 사용된 비유가 어린아이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참신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시는 1966년 시인의 나이 만40, 고려대 영문과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던 시절, 개학날 뒷문 오르막길을 오르며 지었다고 한다. 절제된 시어와 투명한 이미지 속에 사물들의 명암과 윤곽이 뚜렷하게 만져진다.
시간의 선후관계가 보이는 3연부터 5연까지는 계절의 추이가 드러난다. “여울물 한 번/몸에 닿아 보지도 못한/여름”, 모래밭처럼 푹푹 찌던 시가지를 걸었던 기억도 언제 그랬나 싶게 잊혀지고 가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다. 그 시간의 연속성이 각 연이 물처럼, 물감처럼 번지며 흐르는 형태를 낳았다. 이는 ‘고, 나, 면’의 연결형 어미 때문이기도 하고, 유음 ‘ㅇ’ ‘ㅁ’(여울물, 몸에, 여름)으로 시작되다 유음과 설음(모래밭, 시가)을 거쳐 무성음(길경꽃)으로 이르는 것과도 결부된다. 특히 5연 “길경(桔梗)꽃 빛 구월의 기류(氣流)를 건너면,”은 ㄱ음이 네 차례나 반복되는 시적 효과를 통해 가을의 색조와 톤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온도의 차이로 일어나는 공기의 흐름을 기류(氣流)라 한다.
구월의 기류는 단연 도라지꽃(桔梗), 그 오묘한 보랏빛이다. 그 빛은 더위를 끌어당겨서 빚은 기운이다. 여백과 배음을 중시하는 이 짧은 시는 구월 아침을 온천지에 가득한 보랏빛에 젖게 한다.
신선한 변화는 빛나는 감각으로 이 시의 절정을 이룬다. “은피라미떼/은피라미떼처럼 반짝이는//아침 풀벌레 소리.” 이를 은빛 반짝임의 시각적 이미지와 풀벌레 소리의 청각적 이미지가 결합된 공감각적 이미지로만 치부할 수 없다. 반짝이는 물빛은 여울을 박차고 튀어오르는 피라미떼를 낳았고 이는 아침 공기의 실핏줄을 뚫고 온 천지에 퍼지는 풀벌레 울음으로 일체가 된다. 신비감마저 풍기는 보랏빛. 보랏빛의 심장처럼 느껴지는 은피라미와 풀벌레 소리. 계절은 어김없이 구월 하순으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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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은 시인 약력
경북 안강 출생. 198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5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 저서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외 7권, 1996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경주대 교수.